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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Feb 10. 2023

별난 침팬지가 결혼했다.

사진 출처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022


공동 혼인과 공동 육아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의지하고 동고동락하며 한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살겠다”


결혼식장에 선 신랑과 신부는 큰 소리로 다짐한다. 결혼식은 화려하고 거창하다. 신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신부는 더없이 아름답다. 성혼선언문을 통해 이들은 일가친척과 친지를 모신 자리에서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강렬하고 깊은 사랑이 결실이 결혼이고, 죽을 때까지 그 열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약속이다. 아쉽지만, 역사상 오랫동안 사람들은 사랑처럼 비이성적이고 유약한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성욕과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구와 이타적인 욕구를 결혼생활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역사 속에서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여겨진 경우는 몹시 드물다고 스테파니 쿤츠가 저서 『진화하는 결혼』(작가정신, 2009)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결혼의 어떻게 시작됐을까? 정확한 연도를 알 수는 없지만, 별난 침팬지가 문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종족 보존과 성욕이라는 본능을 충족하기 위한 짝짓기에서 남녀의 결합을 통해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의 결실인 결혼의 여정을 살펴보자.  


약 7만 년 전에서 3만 년 사이에 일어난 별난 침팬지의 인지 혁명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신화를 만들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도구를 개량했다. 처음에는 나무나 돌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었지만, 별난 침팬지는 똑똑해진 머리를 활용해 청동이나 쇠로 된 도구를 만들어냈다. 첨단 무기를 갖춘 별난 침팬지의 수확량은 예전보다 몇십 배나 증가했다. 인류 최초의 기술 혁명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는 비약적인 발전이다.      


드디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구분이 시작되었다. 영리한 별난 침팬지는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남들보다 몇 배 심지어 몇십 배 생산력이 좋은 별난 침팬지는 수확한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게 싫어졌다. 이제는 각자 알아서 자기 것 자기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별난 침팬지의 경제적 공동사회는 끝이 났다. 원시시대의 공산 사회는 막을 내리고 자기 것을 자기가 챙기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냥 도구가 허접하고 사냥 실력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쉽지 않았다. 혼자 일하면 생산력은 낮고 수확물이 적어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다. 가족은커녕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들 시절이라 당연히 공동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남성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아내와 가족을 이루어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생존과 종족 보존의 숙명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낳고 또 보호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가 아내와 남편을 공유함으로써 자식을 부양하고 후손을 볼 수 있었다.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일부일처제

별난 침팬지의 혼인 관계의 발달 과정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 1818 ~1881)의 1877년 저서 『고대사회』(문화문고, 2005)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역자 후기까지 포함하면 650쪽 분량의 결혼제도의 변천을 서술한 방대한 역사서다. 더구나 글자 수까지 빽빽해서 도저히 다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헨리 모건의 원서와 해설서를 대조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인용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헨리 모건의 연구에 따르면, 원시시대에는 보통 집단혼 형태의 사회였다. 집단 내 모든 이성과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형태였다. 그러다가 농업과 목축 사회로 넘어가면서는 대우혼(對偶婚)이 출현했다. 대우혼은 남녀 1대 1로 혼인 관계를 맺지만, 결혼 주기가 짧아 평생 여러 명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부터 우리가 결혼이라 불리는 제도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별난 침팬지의 경제 기반은 농업과 목축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렵 생활을 완전히 청산한 것은 아니다. 남성이 수렵을 담당하고, 여성이 식물 채집과 작물 재배를 담당했다. 사냥은 늘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남성의 사냥감 공급은 불안정했다. 그러다 보니 주된 식량의 공급은 농사와 채집을 담당하는 여성의 몫이다. 자연히 가족 내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높은 모계사회가 되었다.    


여성이 중심이 된 모계사회는 농업을 기반으로 축적된 사유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해 줄 수 있게 됐다. 자기 자식이 누군지 분명히 아는 어머니는 자기 자식에 재산을 물려주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대우혼은 종족 보존과 안정적인 가족생활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사냥하는 남성이 가정 경제를 유지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 후 청동이나 쇠로 만든 농기구 덕분에 곡물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별난 침팬지는 위험한 사냥을 그만두고 강가에 터를 잡았다. 경제적 기반은 수렵에서 목축과 곡물 재배로 바뀌었다. 서서히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이 정착했다. 끊임없는 정복 전쟁으로 인해 남성들은 대거 사망하고 여성들의 숫자가 넘쳐났다. 전쟁의 잔혹성과 남성 숫자의 격감으로 남성의 지위가 상승하고, 가족 내 권력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약 1만 2천 년 전후의 시기에 농업혁명이 성공했다. 별난 침팬지의 경제적 기반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농경 사회로 넘어갔다. 우수한 농기구와 영리한 머리를 가진 별난 침팬지는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웠다. 그는 자기 재산을 자기 자식에 물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부를 축적한 별난 재산의 상속 욕심과 이를 뒷밤침하는 남성의 권력이 일부일처 제도를 만들었다. 많은 사회학자가 초기 결혼을 섹스를 독점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보다 재산 관리라는 측면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별난 침팬지의 일부일처 결혼제도는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랑의 증표라든가 로맨틱한 사랑의 완성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한 투쟁이 완결되기 전에 그런 달콤한 말을 속삭일 겨를이 없었다. 별난 침팬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껴줄 애정을 갖지 않았다. 경제적 이유가 더 앞선 탓에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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