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침팬지의 브이라인 만들기> 마무리 글
인클로저 운동과 상품으로 전환한 노동
중세 말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모든 상업 거래에서 화폐가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의 농민은 영주를 위해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았다. 향신료와 같은 동양의 진귀한 물건을 사기 위해 현금이 필요한 귀족은 농민들에게 수확물 대신에 현금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귀족은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현금으로 받아도 액수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게 늘 불만이었던 귀족의 귀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농작물을 키우기보다 그 땅에 양 떼를 길러 양털을 파는 게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유럽의 모직물 산업은 날로 번창했고, 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갔다. 당연히 양털 가격은 올라가고, 농작물을 키우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 많이 남았다.
어느 날 영주는 소작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오늘부터 내 땅에 농사를 짓지 않겠다. 대신 양 떼를 기를 테니 당신들은 이 땅을 떠나도록 하시오!!"
이게 웬 날벼락인가. 농민들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얼이 빠졌다.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대대로 농사짓던 땅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떠난 넓은 농토에 말뚝을 박고, 그 안에 양 떼를 방목했다. 이것이 15~16세기 영국 모직물 산업의 발달로 일어난 1차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농토를 대규모 곡물 농업으로 전환하는 2차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럽의 장원경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 바람에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고, 공장 노동자나 도시 하층민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15세기를 지나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의 피렌체나 영국의 런던 같은 도시는 자유의 표상이자, 신분의 자유를 누리는 특권 지역이 되었다. 신분의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 농민에게 도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유럽의 도시는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사람을 유치하는 중이었다. 도시는 일정 기간 거주하는 사람에게 신분의 자유를 주었다. 이때 나온 말이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거나 '1년 하고 하루를 지내면 도시의 공기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독일의 속담이다.
도시가 값싼 노동력으로 넘쳐나자 산업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미 옷감을 짜는 기계가 발명되었지만, 제대로 된 동력장치가 없어 불편했다. 기껏해야 말을 이용해 기계를 돌리니 옷감 생산량이 변변치 않았다. 18세기 말 드디어 영국에서 기계에 동력을 제공하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다. 공장주에게는 증기기관의 발명이야 말고 경사 중의 경사였다. 증기기관을 이용해 방직기를 돌리니 모직물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경제구조는 새로운 질서를 찾아갔다. 이제 생산도구인 공장과 기계를 가진 공장 주인의 세상이 되었다. 공장과 기계를 자본이라 이름하고, 이것을 소유한 사람을 자본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자본가들이 이윤을 독점하고,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자에게 겨우 하루 빵 한 개를 지급하는 등 노동 착취가 심각했다.
농민은 생산수단인 땅과 농기구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들은 생계 수단인 생산도구를 모조리 빼앗기고 오직 자신의 노동을 판매해서 먹고살아야 했다. 노동과 자본은 이렇게 완전히 분리되었고, 노동은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이제 노동은 땀을 흐리는 보람도 아니고, 자기 창조의 실현이 아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내다 팔 상품으로 전락했다.
이제 모든 것이 이익을 중심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루어지는 세상이 됐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역사의 패권을 틀어쥐었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제 활동하는 체제를 말한다. 그것도 산업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자본가가 직접 산업을 소유하는 산업자본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별난 침팬지의 고독과 외로움
자본주의 초기 노동자는 소외와 불안 그리고 고독을 달고 살았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냉철하게 분석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카를 마르크스는 ‘통제력의 상실’로 소외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해석하면, 노동자는 생산수단인 자본을 소유하지 못했기에 자본을 통제할 권한을 상실했다. 그 결과 노동자는 생산활동을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고, 오히려 조직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늘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가 됐다.
노동자는 자기가 만든 생산물과 그것을 생산 과정을 통제할 수 없다. 또 동료와의 관계도 통제할 수 없고, 노동을 통한 창조성을 발현할 수도 없다. 생산물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고, 생산방식도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노동은 주어진 일만 반복해야 하는 지루한 과정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는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도 소외된다. 각각 맡은 업무가 있고, 자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쁘다. 동료와는 협조적 관계가 아니라 경쟁적 관계를 맺는다. 동료애는 파편화되고 서로가 고립의 길을 걷는다. 직장생활은 고독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성은 먹기 위해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오직 생존을 위해서 먹이 사냥을 하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생존 욕구를 넘어서 창조적인 생산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먹고살기 위해 월급을 대가로 노동한다. 창조적인 생산활동을 통제할 수 없고,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창조적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자본주의의 극심한 노동 착취 현상을 보며 인간의 소외 현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사실 그가 주장한 내용은 이보다 더 전문적이고 난해하다. 내가 이해한 것까지만 소개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문제점들을 많이 수용하고 완화했다. 조직 문화도 창조적이고 상호협조적으로 바꾸고, 가능하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많이 배려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을 곧이곧대로 현실에 투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내용과 형식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많은 사람이 자기 꿈을 실현하는 길과는 거리가 멀지만,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현실이 삶을 질식하게 해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팔 수 있는 것은 노동뿐이다. 말이 좋아 지적 산업이라 이야기해도 본질은 노동임이 분명하다.
별난 침팬지는 수백만 년의 세월을 숨가쁘게 달려와 자본주의 체제에 도달했다. 이제 나무에서 내려온 별난 침팬지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 별난 침팬지가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설명했다. 인지 혁명, 청동기와 철기의 기술혁명, 농업혁명 등 일련의 혁명적 발전을 거친 별난 침팬지는 화려한 인류 문명의 길을 걸었다. 그 사이 브이라인의 얼굴을 얻었고, 날렵한 몸매도 갖췄다. 몇 번의 경제체제의 변혁을 통해 사회구조가 바뀌는 것도 경험했다.
별난 침팬지는 약 6~7백만 년에 걸친 장구한 진화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산업자본주의의 세상으로 들어왔다. 엄청난 물질적 풍요의 대가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자연을 떠나 도시를 방황하고, 동료와의 관계도 멀어졌다. 생산물도 만지지 못하고, 생산과정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늘 불안하고 고독하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이것으로 별난 침팬지의 이야기를 모두 마친다. 브런치 북 글이 최대한 30개까지 올릴 수 있어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 짓는다. 현대 자본주의 속의 별난 침팬지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자. 그때 진화의 최종 단계로 될지 모르는 인공지능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사피엔스 이후로 자연에 적응하는 생물학적 진화는 끝났다. 인간은 자연을 변형시켜 자연이 우리 삶에 적응하게 한다. 마지막 진화는 인공지능이 생물학적 지능으로 변화하는 순간에 완성되지 않을까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