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Feb 16. 2023

사랑의 쓸쓸함과 사랑의 기술

사랑은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이다.

“사랑이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인가?”


독일 출신의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묻는다. 그가 저서『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19)에서 한 물음이다.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면서 말을 잇는다. 그는 사랑에 빠진 사람도 사랑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에 한 번 빠지면 그걸로 끝나는 줄 아는데, 프롬의 말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사랑하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사랑의 기술을 갖추는 데는 관심이 없다. 누굴 만날지 대상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최초의 경험이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착각한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거나, 오래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 관심이 많지만 정작 사랑하는 기술을 모른다는 에리히 프롬의 지적에 가슴이 뜨끔하다.  


그 참 사랑하는 것도 기술이라니 생뚱맞지만, 꽤 놀랍고 날카로운 통찰력이다. 우리가 기술을 익히는 까닭은 일의 능률과 생산성을 높이고, 그것을 통해 나와 조직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랑의 기술도 마찬가지다. 에리히 프롬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돌봄, 존중, 책임감, 앎을 수반하는 생산성의 표현이다. 이 생산성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이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해된다.


스위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알랭 드 보통(Alan de Botton)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청미래, 2015)에서 하는 말도 들어보자. 그는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 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굴 첫눈에 반하고 화들짝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착각일 수도 있다. 처음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저 외모나 느낌을 보고 훅하고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비로소 상대를 의도적으로 과장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작 그때는 사랑의 기술이  없어 다투고 갈등하며 사랑이 떠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성숙한 사랑은 첫눈에 반하지 않는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글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첫눈에 빠지는 사랑의 감정이 복잡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절대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맑은 눈으로 물의 깊이와 성질을 완전히 조사할 때까지 도약을 유보한다. 부모 노릇, 정치, 예술, 과학, 부엌에 비치할 적당한 간식에 관하여 철저하게 의견 교환을 한 뒤에라야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사랑의 화학물질이 줄어든다 해도

사랑 그 참 어렵다. 쉽게 우리는 사랑을 말하고, 사랑에 빠졌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헬렌 피셔의 말처럼, 두뇌에서 용솟음치는 호르몬의 작용이라면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인간의 두뇌가 만드는 화학물질은 길어야 2년에서 3년이면 필연적으로 줄어든다. 영원할 것 같은 뜨거운 마음도 얼음장처럼 식는 시간이 그렇게 짧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사랑하는 일이 이래서 참 쓸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다고 말한다. 누구든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굳이 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만일 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게 아닐까. 꼭 이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사실은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운명 같은 사랑이 있기는 한 걸까. 오히려 운명 같은 사랑을 하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다. 


착각이든 아니든 사랑에 빠져 머릿속에 화학물질이 용솟음친다면 그런 사랑도 좋은 게 아닐까. 더구나 너무 운이 좋아 평생을 두고도 사랑의 화학물질의 농도를 처음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 연인도 있을 것이다. 바라만 봐도 도파민이 솟고,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덕분에 스킨십의 행복에 빠질 것이다. 평생을 처음 그 뜨거운 열정으로 산다면 용솟음치는 화학물질로 두뇌의 신경회로가 타버리지 않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연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운이 닿지 않아 제대로 알 기회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 마주치면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젖는다고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 사람과 다른 사랑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면 우리의 현재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사람들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 영원할 줄 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종일 그 사람 생각으로 가슴 떨리는 그 사랑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불같은 사랑이 식다니, 영원한 사랑의 불이 쉬 꺼질 줄 몰랐다. 만일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영원한 사랑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 알랭 드 보통은 운명인 줄 알았던 사랑도 사실은 만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랑 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랑은 참 쓸쓸한 일이다.

참 사랑하기 힘들고, 사랑하는 일은 노래 가사처럼 참 쓸쓸한 일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사랑을 지키는 일이 더 힘들다. 사람들은 끝내 처음의 그 뜨거움을 지키지 못하고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그 아픔 때문에 다시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두려워하며 쓸쓸함에 빠진다.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랑을 너무 일찍 불태우지 말고 불씨를 잘 보관하면 된다. 전쟁같이 뜨거운 사랑은 겨우 2년 남짓 간다. 그 후에는 사랑의 색깔을 바꾸고, 묽어진 농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동반적 사랑이나 우정 같은 사랑이면 오래 두어도 잘 변치 않는다. 늘 뜨겁기고 불타오르는 첫 느낌만 고집하지 않으면 가능하다. 불꽃 같은 사랑이 식어도 세상을 함께할 따뜻한 동지애면 어떨까. 눈에 씌었던 콩깍지가 벗겨졌을 때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사랑의 기술'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아니 그보다 한 번 사랑에 빠졌다고 영원할 거라는 생각을 고치는 게 필요하다. 첫눈에 반한 사랑은 맹목적인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열정은 식고 만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랑을 다독여야 한다.


불꽃이 약해지고 열정이 식은 후 필요한 것이 사랑을 '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과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사랑의 지혜다. 나부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사랑의 기술 하나 없이 사랑한다고 떠들었으니 부끄럽고 안타깝다. 


양희은 님이 부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가사 일부를 음미하며 마무리하자.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작가의 이전글 불휘 기픈 남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