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보다 어정쩡한 이성

by Henry

그놈의 팬데믹 때문에

그놈의 팬데믹이 청춘을 옥죄었다.

코라나 이후 처음으로 개강 모임을 가졌다.

역시 젊은 열정적이고 낭만적이다.

학생들은 강의실보다 바깥에서 더 좋은 모양이다.

공부하자면 풀 죽던 녀석들도 그저 신이 났다.

청춘은 낭만과 감성으로 충만하다.


화기애애한 자리를 무탈하게 마무리했다.

마치고 동료와 간단한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한 분이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내 그림을 봤노라며 칭찬한다.

너무 과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자기도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열정 넘치는 그분의 말이다.


"색을 보면 열정이 끓어오른다.

빨간색을 보면 황홀함을 느낀다.

색에 빠지고 몰입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아를 https://m.blog.naver.com/ulove_2010/221320671478


그는 고흐를 보러 프랑스 남부 여행을 했다고 한다.

아를(Arles)과 생레미(Saint-Remy)도 가봤다.

론(Rhone) 강의 별밤을 직접 보았다.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떠난다고 한다.


나도 아를을 가봤다.

나도 론 강의 강변에도 섰다.

생레미의 별밤을 올려도 봤다.

다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분과 나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이분이야말로 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적이다.


나는 감성이 풍부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폭발적인 감성을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만 많은 생각을 한다.

어정쩡한 이성형이다.


뜨거운 감성이 부족하면, 냉철한 이성이 풍부한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다.

폭발하지 못하는 휴화산이라고 할까.

아침엔 비까지 내려 마음이 쓸쓸하다.


당분간 어반 스케치만

토요일 아침은 늘 화실에 간다.

어제도 그랬다.

선생님께 동료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자주 슬럼프에 빠진다고 고백했다.


"나는 왜 색에 확 빠져들지 않을까요?"

“음... 이유가 조금 짐작 가네요”


그림을 그릴 때 색감보다 형태를 더 중시한다.

구도와 묘사에 재미를 느낀다.

색을 마음껏 구사하고 과감하게 시도하기보다

정교하게 색을 고르고 거기에 맞게 색칠하려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색감이 잘 안 나올 때가 많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럼 처방이 뭔가?

스케치와 묘사에 몰입하기로 했다.

색은 가능하면 묽게 칠할 것이다.

돌고 돌아 어반 스케치 풍으로 왔다.

여기서 기본기를 다져야겠다.

그리고 난 후 나만의 색감을 개발해야 한다.


몇 번의 수상과 몇 번의 전시회

그것도 좋았지만 몰입할 필요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뭔지 찾는 게 급선무다.

기지도 못하는데 날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역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내게 딱 맞다.


그래서일까.

어제는 꼬박 고사리역만 스케치했다.

같은 장소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했다.

연달아 몇 장을 스케치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푹 빠졌다.

지웠다 그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흠뻑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길을 제대로 잡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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