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슬기로운 동거 생활】
스스로 별이 된 아름다운 남자
"뭐, 그가 자살했다고?"
"만우절이라 장난친 거지?"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호텔 24층, 아름다운 한 남자가 투신했다. 2003년 4월 1일,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아시아의 별이 떨어졌다. 장이머우(장예모·張藝謀) 감독의《패왕별희(霸王別姬,1993)》속 경극에서 초나라 항우의 연인 우희 역을 맡은 장궈룽 말이다. 당시 46살인 그는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이자 가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홍콩 영화가 아시아를 휩쓸었다. 지금의 한류 열풍 저리 가라 할 만큼 대단한 위세를 떨쳤다. 그 중심에는 장궈룽(장국영·張國榮)이 있었다. 고독과 우수의 눈동자를 가진 장궈룽은 많은 젊은이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 그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만우절의 흔한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의 죽음이 사실로 밝혀지자 사람들은 크게 충격받았다. 그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언론은 장궈룽의 자살 이유로 우울증을 들었다. 한동안 그의 팬들 사이에는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다.
요즘 젊은 세대가 장궈룽이 누군지 알기나 할까? 그가 살아 있다면 올해 66세의 나이다. 전성기를 지나 올드 보이가 됐다. 주연 배우가 아니라 회장역을 맡거나 노신사 역을 맡고 있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를 모를 것이라는 내 짐작이 보기 좋게 빗나간 일이 일어났다.
장궈룽이 죽은 지 올해 20년이 됐다. 3월 31일 그의 추모 행사가 홍콩의 한 쇼핑몰에서 열렸다. 1만 2,000석 규모의 추모 콘서트 티켓이 사전에 다 팔렸다. 그의 공연 의상과 소장품 전시회장에도 팬들로 넘쳐났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추모식에 10대에서 30대의 팬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장궈룽이 죽고 난 뒤 태어난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젊은 세대는 유튜브·SNS 등으로 장궈룽을 만났다. 공연장에서 직접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은 젊은이들은 장궈룽에게 매료됐다. 아무리 그가 유명했다고 하나 죽은 지 무려 20년이다. 그런 그에게 젊은 팬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홍콩의 젊은이들은 홍콩 영화와 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장궈룽을 그리워한다.
장궈룽은 영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중성적 이미지를 보였다. 그때는 동성 연인을 사귀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장궈룽은 콘서트에서 빨간 하이힐을 신은 채 남성 댄서와 전위적인 춤을 추었다. 긴 머리에 중성적 느낌의 의상을 입는 등 90년대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로 젊은 세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아비정전(阿飛正傳), 고독한 청춘을 위한 헌사
그의 영화는 몇 번이나 재개봉하거나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다. 며칠에 걸쳐 장궈룽의 영화 몇 편을 이어 봤다. 어제 마지막으로 본 것이 왕자웨이(왕가위·王家衛) 감독의《아비정전(阿飛正傳, 1990)》이다. 개봉 당시에 폭삭 망한 영화였지만, 후에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왕자웨이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그의 작품 세계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아비(阿飛)'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양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그런 탓에 그는 사랑을 믿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찾으며 방황한다. 바람둥이 '아비'는 경기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을 유혹한다. 그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수리진'은 '아비'와의 결혼을 꿈꾼다. 늘 방황하는 '아비'는 그녀의 소망을 외면한다. '아비'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만나러 필리핀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아비'를 만나기를 거절한다. 상심과 절망이 그를 짓누른다. 수리진은 그런 그를 잊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 시절 장궈룽의 영화는 더디고 느리다. 서론이 길고 사설로 넘친다. 갈등 구도는 길게 늘어진다. 지금의 템포 빠른 영화에 익숙한 사람은 지루하다. 영화의 분위기도 무겁다. '아비정전'은 내내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장궈룽을 잊지 못한다. 장궈룽의 우수에 젖은 눈빛은 현대의 젊은이들을 매혹한다. '아비정전'은 외롭고 고독한 청춘을 위한 헌사다.
어디든 젊음은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한다. 지금의 청춘에게도, 그때의 청춘에게도 현재는 빈약하고 미래는 불안하다. 영화 속 아비도 그랬고, 수리진도 그랬다. 나른하고 몽환적인 기타 연주 <Always in My heart>도 영화와 잘 어울린다. 맘보풍의 <Maria Elena>에 맞춰 춤추는 장궈룽을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장궈룽 영화 속의 음악은 그의 고독과 외로움을 잘 나타낸다.
빠른 속도에 익숙한 요즘 세대와는 장궈룽이 어울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뜻밖에 많은 젊은 친구들이 그를 좋아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가 부활했다고 할까. 아니 아날로그가 죽은 적이 없으니 아날로그의 부흥이 맞겠다. 느리고 더딘 감성은 여전히 우리 마음을 흔든다. 그래서일까, 4월이면 고독한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