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5센티미터, 분홍 눈 내리는 마을

【AI와 슬기로운 동거 생활】

by Henry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꽃잎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응? 뭐가?"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말이야, 초속 5센티미터"

"아카리는 그런 걸 잘 알더라"

"왠지 꼭 눈 같지 않니?"

"그런가?"


《초속 5센티미터(2007)》는 색과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일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소녀 아카리와 소년 타카키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벚꽃 나무 아래를 지난다. 분홍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아카리와 타카키가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다. 영화 내내 화려한 파스텔 색조와 햇빛이 너무 아름답다. 어반 스케치풍의 그림이 너무 좋다.


아카리와 타카키는 단짝이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다. 아키라가 멀리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둘은 편지로 대화하며 서로를 그리워한다. 타카키도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 되자, 1년 만에 둘은 만나기로 한다. 아카리의 마을 근처 이와후네 역에서 저녁 7시에 만날 약속을 잡는다. 둘은 설렘과 기다림으로 그날을 기다린다.


오후 일찍 타카키가 약속 장소를 향해 출발한다. 시간을 꼼꼼히 따져봤기에 약속 시간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아, 그런데 하필 약속한 날 폭설이 내린다. 전철이 연착을 거듭하면서 시간이 늦어진다. 그러다가 이와후네로 가는 열차는 아예 빈 들판에 서 버린다. 온 사방에는 짙은 어둠이고, 하얀 눈만 지천으로 내린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약속 시간 7시를 훌쩍 넘긴다.


열차를 갈아탈 때마다 타카키의 마음은 초조하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고, 문자 메시지도 보낼 수 없던 시절이다. 아카리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타카키를 짓누른다. 늦은 기차는 밤 11시 15분에서야 이와후네 역에 도착했다. 시골 간이역 대합실의 연통 난로에는 불이 타고 있다. 낡은 의자에 몸을 숙인 아카리가 기다리고 있다.


둘은 인적이 끊긴 역사를 빠져나왔다. 폭설이 내리는 길을 하염없이 걷다 둘은 처음으로 입맞춤한다. 어린 연인들의 애틋한 첫사랑 위로 시나브로 하얀 눈이 내린다. 한참을 걷다 마을 어귀 어느 집의 헛간에 들어가 추억을 얘기한다.


다음 날 아침, 둘은 이와후네 역에서 헤어진다. 타카키는 도쿄로, 아카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어른이 되어 분홍 꽃나무가 있는 기찻길 건널목에서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안타깝게 운명은 그들을 비껴간다. 스마트폰도 SNS도 없던 아날로그 시절의 첫사랑은 애틋한 추억으로 남는다.


해마다 4월이면 마을에는 분홍 눈이 내린다.

해마다 4월이면 우리 마을에는 분홍 눈이 내린다. 봄이면 아파트 입구에 도열한 벚꽃 나무의 꽃들이 만개한다. 저녁 불빛을 받은 분홍 꽃잎은 몽환의 세계로 이끈다. 꿈을 꾸듯 분홍색 벚꽃 나무 아래를 걷는다.


어제는 얄밉게도 바람이 불어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봄은 벚꽃 지는 속도로 물러난다. 거리에 온통 분홍 꽃눈이다. 4월에 내린 눈은 상서로운 소식을 전한다. 올해는 좋은 일이 있으려나? 어쩌면 가을 들판에 풍년이 들지도 모르겠다.


벚꽃 나무 아래 의자를 둔 카페가 있다. 해마다 꽃 지는 밤에는 그곳을 찾는다. 간간이 하얀 벚꽃 잎이 붉은 와인 잔 위로 떨어진다. 그런 밤에는 꽃잎 담긴 와인을 마신다.


사진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4270413625465


어제는 분 강풍에 남은 꽃잎들도 다 떨어졌다. 이제 올봄도 막바지다. 내년 4월이 되어야 우리 마을에는 분홍 눈이 내릴 것이다. 청춘의 봄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긴 방황을 끝낸 사람에게 늦은 봄마저 감미롭다. 얼마 남지 않은 봄의 끝자락을 붙잡아야겠다.


'초속 5센티미터‘가 지금의 청춘 세대에도 맞을까 모르겠다. 어반 스타일의 장면과 화려한 영상미는 지금 세대에도 통할 것 같다. 촌스러운 듯한 화면이 오히려 아련한 추억을 올리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첫사랑은 늘 애달프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은 세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 이야기부터 휴대폰이 등장한다. 아카리와 타카키의 첫사랑은 첫 번째 이야기에 담겼다. 그곳에는 SNS도, 스마트폰도, 디지털도 없다. 둘은 손 편지와 공중전화 그리고 집 전화로 소통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은 아날로그 세상이다.


꽃잎이 떨어지는 초속 5센티미터, 한 시간에 겨우 180미터의 거리다. 실제 속도는 그보다 빠르다고 한다. 그게 뭐 중요할까. 어차피 광속으로 정보가 오가는 디지털보다 한참이나 늦다. 더구나 AI가 수많은 정보를 뱉어낼 시간에 벚꽃은 더디게 진다.


꽃 지는 봄밤에는 아날로그의 굼뜬 속도가 좋다. 시간이 좀 느리면 어때? 남은 봄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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