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색의 유혹】
푸른 바다와 언덕 위의 하얀 집
"와, 과연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어쩜 저렇게 파랑은 더 파랗고, 하양은 더 하얄까?"
화산재 위에 지은 하얀 집이다. 그 위에다 하늘은 매끈한 붓질로 파란색 바다와 흰 구름을 칠했다. 깎아지른 언덕과 눈부시게 하얀 집, 둥근 푸른 지붕, 코발트색 바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앙증맞은 색색의 화분들. 깊은 바다의 짙은 파랑 덕분에 하얀 집은 더 하얗고, 푸른 바다는 더 짙푸르다. 자연과 인간이 합작한 완벽한 수채화라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크레타섬을 둘러싼 곳에 에게해가 있다. 이곳에 있는 산토리니(Santorini)섬 마을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차곡차곡 쌓은 하얀색 집들이 코발트색 바다와 너무 잘 어울린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에는 그림 같은 집이 많다. 그중에서도 산토리니 마을의 집들이 특히 예쁘다.
산토리니의 색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먼 이국의 향수가 물씬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계절의 색도 빼어나기로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자연은 철마다 다른 색의 옷으로 단장한다. 산과 들판은 그 자체가 천연색의 파노라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매혹하는 색채의 미학이다.
색의 유혹에 빠진 것은 우연이다. 오래전 이야기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미국 출장 가는 길에 대도시 근교의 아웃렛(outlet)을 방문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아웃렛 몰이 많지 않았던 때다. 사람들은 검은색과 흰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크기는 얼마나 크던지, 그리고 옷과 액세서리의 색깔이 얼마나 다양한지 깜짝 놀랐다. 눈으로 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호강이었다. 빨강과 파랑의 원색, 그리고 파스텔색(pastel tone)의 잔치가 벌어진다. 다양한 색깔을 보면서 마음도 색채에 물들었다.
빛과 색을 이야기하면서 기껏 아웃렛 몰의 패션에 감동했다니 꽤 웃기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직접 보고 느끼는 감정이 더 진지한 법이다. 그 뒤로 가끔 낯선 도시의 아웃렛 몰이나 명품 매장을 들른다. 명품을 살 형편은 안 되고, 그저 색을 구경하는 재미로 찾았다.
내게는 패션의 컬러가 색채의 문을 여는 키였다. 명품 매장이나 아웃렛에 진열된 옷 색깔이 화려했다. 나도 모르게 색의 유혹에 빠졌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색채와의 만남이다. 그렇다고 전문가도 아닌 내가 색을 알면 얼마나 알까 그저 빈 수레의 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색채의 유혹에 빠진다.
불현듯 그림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도 미술관을 다녔지만, 그냥 겉치레에 그쳤다. 제대로 미술관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이 그려내는 화려한 색의 질감이 좋았다. 그 뒤로 해외 출장을 가면 꼭 그 도시의 미술관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런던 내셔널 갤러리, 파리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이들 미술관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들이다. 작품 수도 어마어마하고, 내로라하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즐비하다. 처음에는 작품을 스치듯 구경하고, 그림을 봤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괜한 자기만족에 빠졌다. 문제는 주마등처럼 스친 그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부하지 않고 그림을 보는 일은 자칫하면 고행의 수도길이 되기 쉽다. 한참 보다 보면 그 그림이 그 그림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건 화가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과 그걸 그린 사람을 제대로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가 앙리 마티스와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만났다. 그들의 강렬한 색채가 마음을 끌었다. 아, 이들을 왜 색채의 마술사라 부르는지 알겠다. 앙리 마티스의 폭발적인 색채와 힘찬 붓질은 캔버스 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 모양이 마치 난폭한 한 마리의 야수와 같다고 해서 '야수파의 화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마티스가 죽은 후, 진정으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화가는 샤갈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색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색의 느낌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 걸로 만들고 싶었다. 색채의 미학을 공부하기 위해 에바 헬러의 l『색의 유혹 1, 2』, 안느 바리숑의 『The Color』. 괴테의 『색채론』을 읽었다. 색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와 색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좋았다. 또 색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 말고도 몇 권의 책을 더 읽었지만, 지식은 늘 모자라고 부족하다.
색의 역사를 많이 아는 것과 색을 잘 다루는 것은 다르다. 직접 그림을 그려 보면서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색을 다루고 보는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다. 그것이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고 자질이다. 내내 안타까운 사실은 내게 그런 재주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우리 생활에서 색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색을 통해 사물을 식별하고, 색을 통해 세상을 본다. 사람을 매혹하는 색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빛과 색의 이야기를 통해 색의 근원을 탐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