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여름과의 작별

by Henry

세상 어떤 결별도 쉽지 않아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넘겨주기가

얼마나 아쉬울까

종일 여름이 울고 있어



비 오는 풍경.jpg


여름은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모르는 모양이야.

그렇게 등등하던 기세를 어디다 내팽개치고

하나님한테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있는가 봐.


몇 날을 두고 내리는 비를 보니

떠나기 싫은 여름이 눈물깨나 뽑는 중이야.

갈 때가 되었다 싶으면 알아서 채비를 차릴 일이지

바쁜 하나님 붙들고 더 있겠다고 하소연하면 어쩌나.


세상 어떤 결별도 쉽지 않아.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넘겨주기가

얼마나 아쉬우면

종일 여름이 울고 있어.


늘 가기 싫어 투정 부리던 계절 탓에

환절기마다 사람들은 홍역을 치르지.

대세가 꺾였으니

여름도 족함을 알고 물러가야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잠시 퇴각했다

한낮에는 여전히 점령군 노름에 정신이 없어.


어쩌겠나.

한때는 7월과 8월을 호령했던 여름이고 보면

과거의 영광이 왜 생각나지 않을까.

사람도, 계절도 찬란한 청춘을 어찌

쉬 잊을 수 있을까

우리 또한 세월이 다가오는 걸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잖아.


그런 내 마음 같다고 생각하니

가기 싫어하는 여름을 영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야.

그렇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법

아름다운 이별을 해야겠지.


오늘 아침에는 찬 바람이 불었어.

창문을 여니 소슬한 바람이 들이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창문을 닫았어.

여름도 새벽에는 영 맥을 못 추는 걸 보니

이제 결별할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을 거야.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니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어.

비 올 줄 모르고 나선 길이라

비 좀 맞으면 어떨까


학교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더 굵어지고

습도 높은 공기 탓에

멀리 퍼지지 못하는 빗방울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잔뜩 흐른 하늘은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어.


따뜻한 예가체프의 달콤한 산미

비가 오면 까무러치게 예쁘다는

벨레 에포크(Belle Epoque, 좋은 시절)의 파리

헤밍웨이의 1920년대로 떠나는 시간 여행

우디 앨런의 'midnight in Paris'의 OST 'bistro fada'

이 분위기에 딱 맞지 않을까.


아니면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을 읽기에도 좋은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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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가 히로시게의 '아타게 다리의 소나기'(1875, 목판화)

그걸 그대로 모방한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1887, 유화)

두 개의 그림을 보면서

비 오는 풍경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생뚱맞다고?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비가 올 때면 고흐의 그림이 떠올라서

한 번 추천해 봤어.

취미가 아니면 그냥 Pass~~ 하면 돼


하늘은 잔뜩 흐리고

햇빛은 보이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뚝 떨어진 세로토닌 농도는

멜랑콜리, 센티멘털, 에뜨랑제

뭐 이런 이국의 단어를 떠올려.


기분은 약간의 가라앉음, 성찰, 몽환

그래도 이 정도면 상큼한 가라앉음이야.


멀리 보이는 산 그림자는 안개비에 젖고

늦여름은 비에 젖은 채 내 발끝에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 하지만

이제 그와 작별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야.


오늘은 시간이 나면 화실에 가서

여름을 위한 연가를 그려야겠다.

비 오는 날은 유화보다 수채화가 더 잘 먹힐 거야.


물을 흥건히 적신 물감으로

비 오는 풍경을 그리면 좋을 거야.

떠나야 할 것과

아름답게 작별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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