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별다방이 없다. 유일하게 제주를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지만이 김포공항 도착 층에 있는 별다방에 들릴 수 있다. 마치 서울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듯 초록색 로고 간판은 반짝였으며, 김포공항을 떠날 건지 도착한 건지 모를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씁쓸한 커피 향기가 코를 찔렀다. 드넓은 매장과 다양한 모양의 의자와 소파. 커피 한잔을 테이블에 두고 책을 읽는 사람들. 낯설었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나의 로망 그 자체인, 테이블의 커피와 책 한 권은 나의 심장을 세차게 요동치게 했다. 쿵쾅쿵쾅.
“어서 오세요. 별다방입니다. 주문하시겠어요?”
초록색 앞치마와 검은색 영어 이름표를 맨 직원이 내게 인사를 한다.
“커피. 음. 혹시 메뉴판 있을까요?”
직원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종이 메뉴판을 건넸다. 이것은 한글이고 저것은 영어인데 무엇이 믹스커피인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메뉴판을 앞뒤로 살펴봤지만 그저 커피라고 적힌 곳 밑에 아메리카노, 카페 라떼라는 글자가 눈에 뜨일 뿐이었다.
“따뜻한 카페 라떼 한 잔 주세요.”
“네. 어떤 사이즈로 드릴까요?”
직원은 다시 내게 환한 미소로 물었다. 커피에도 사이즈가 있나. S, M, L사이즈로 구별하나. 그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본 직원은, 왼쪽에서 컵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며
“이것은 tall 사이즈, 이것은 grande 사이즈입니다. 어떤 사이즈로 하시겠어요?”
“아, 그 제일 작은 걸로 주세요.”
톨인지 툴인지 직원 입에서 갑자기 영어가 나오자 나는 얼른 대답하고는 당황한 몸짓으로 결제를 했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낯섦을 들킨 것 마냥 손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은 이미 붉어졌다. 회색빛의 소파는 부드럽고 푹신했지만 나의 당황한 몸짓을 숨기기에는 어정쩡했다. 카페 라떼가 무엇인지, 사이즈가 무엇인지 알게 뭐람.
커피를 처음 접한 건, 20살 때 대학교 복도 자판기에서 뽑아먹던 500원의 레쓰비 캔 커피였다. 친구가 뽑아 먹길래 나도 먹어봤다. 그 당시에는 내게 500원도 큰 사치였지만, 옆 자판기의 200원 자리 믹스커피보다는 고급스럽게 보였고(물론 그 자판기에도 300원 자리 고급커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원한 아이스커피였다. 500원 자리의 캔 커피라는 것과 '저 이번에 내려요.'라는 유행어의 당사자를 손에 들고 마신다는 것이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그 자부심은 레쓰비의 달달함으로 육지의 대학생활을 견디게 했다. 그렇게 레쓰비가 최고의 커피였던 나는, 20대 중반이 되어 별다방에 첫 발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 Pixabay. 카페 라떼
주문해서 나온 카페 라떼는 하얀 컵 안에 갈색 빛이 감돌고 하얀색 거품으로 그림을 그린 듯 하트가 띄워진 커피였다. 나는 혹여나 하트가 쏟아질까 양손으로 조심스레 컵을 받치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호로록. 으음. 쓰다. 그저 씁쓸하다. 쓴 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에 도달하는 듯하다. 우유의 고소함을 느끼기도 전에 위가 짜릿짜릿하다. 입술에 거품이 묻은 것 같아 서둘러 손으로 닦아냈다. 이 맛은 무엇인가. 내게 익숙한 레쓰비의 달달함과 입술에 닿은 캔의 약간의 쇠 맛(?)을 느끼던 것과는 다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별다방의 카페 라떼란 말인가. 카페 라떼가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홀로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저 멀리 제주가 바다에 홀로 있는 것처럼. 애써 익숙한 공간처럼 익숙한 맛을 보려 했지만, 금세 낯설어진 나의 마음처럼 어색하고 씁쓸했다.
20살의 커피는 제주를 떠난 대학 생활의 시작으로서 500원조차 아까운 캔 커피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내게 달콤했고 달달했다. 하지만 아득한 미래를 앞둔 20살 중반은, 낯섦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다시 제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늘 서울의 씁쓸함을 누리며 카페 라떼를 마시기 원했다. 이를 동경했지만 나의 마음은 견디지 못했다. 그저 온몸에 묻어버린 커피의 향기만 코로 들이키며 입안에 가득 퍼진 씁쓸함을 가지고 터덜터덜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바다 내음을 맡아야만 했다.
제주에 익숙해진 만큼 나의 커피는 믹스커피였다. 봉지 채 뜯어 컵에 가루를 쏟아놓고는 뜨거운 물을 받아 봉지로 휘휘 저으면 끝이었다. 직장 동료들은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 같은 도시 여자처럼 보이는데 시골 할머니처럼 믹스커피를 마신다며 웃었다. 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들이켤 뿐이었다. 이제 내겐 커피는, 그저 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커피가 시골 할머니들의 믹스면 어떠랴. 그저 20살의 레쓰비처럼 달달한 믹스커피가 내 입맛에 맞을 뿐이다. 그렇게 카페 라떼가 잊혀갔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이효리 부부가 몰고 온 이주 열풍은 제주의 공기를 바꿔놓기 충분했다. 부쩍 늘어난 서울 사람들, 제주인데 제주가 아닌 듯한 묘한 온도.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간신히 도착한 김포공항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별다방 특유의 초록 로고는 이제 제주의 흔해빠진 카페가 되었고, 그 영향일까 정작 김포공항의 그 별다방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와버린 별다방, 적어도 내가 아는 제주의 서울 사람은 모두 별다방을 환영했다.
역시, 서울 사람들.
별다방 입점 소식을 부지런히 퍼다 다르고, 개점일을 기억하여 오픈런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그들을 보며 서울 사람들에게 별다방은 커피 그 이상의 무엇임을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출처 : Pixabay. 서울 사람
“커피 뭐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아이스 카페 라떼 grande 사이즈, 샷은 1.5샷으로 부탁해요.”
아. 샷도 내가 정할 수 있구나. 커피의 종류, 사이즈 말고도 샷의 세계도 있구나. 하하. 짐짓 익숙한 척하려 했지만 모르는 것이 있었구나.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오랜만에 나도 카페 라떼를 마셔야지. 내 앞의 사람은 서울 사람이 아닌가. 나도 늘 먹었던 것처럼 아이스 카페 라떼 grande 사이즈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마신 카페 라떼는 여전히 고소한 듯했지만 씁쓸했다. 김포공항에서 홀로 커피를 홀짝대던 나의 쓸쓸함과 낯섦이 생각났다. 하지만 씁쓸하지 않은 척했다. 직장동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늘 도시 여자이고 싶으니까.
서울에서 온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들이 친숙한 별다방에서 약속을 정했고 나도 Drive-Thru에 친숙해지면서 그 씁쓸한 카페 라떼 맛이 내 혀와 몸에 익숙해졌다. 마치 의무감처럼 매일 아침마다 카페 라떼 한잔을 마셨다. 매일 마시는 만큼 더 이상 카페 라떼가 씁쓸하지 않았다. 내 마음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제주의 풍경과 한적함이 좋아 제주에 내려왔다고 얘기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두고 온 서울을 동경했다. 나의 온몸에 묻어버린 바다 내음을 벗어버리고. 씁쓸한 향이 나는 커피 한잔을 테이블에 놓고 자유롭게 홀로 누리는 쓸쓸함을 묻어내고 싶었다. 그저 바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