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유튜브 '곽튜브'에서 이런 대화를 보았다. 유튜버가 택시기사와 함께 목적지를 가면서 나눈 대화이다. 절벽 같은 내리막길을 택시가 스피드 있게 내려가자 유튜버가 "천천히 내려가요." 하며 무서워한다. 택시기사가 웃자 "형님은 항상 웃고 계시네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택시기사가 "안 웃고 살 이유가 뭐가 있어."라고 답한다. 도로는 돌밭길이고 옆으로는 낭떠러지다. 차는 흔들거리며 기우뚱한다. 유튜버의 당황스러운 몸짓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그 영상 너머 택시기사에게 내 마음이 들켜버린 느낌이다.
"엄마, 왜 인상 써요."
"엄마, 웃어봐요."
"엄마, 지금 화났어요?"
"엄마, 스마일."
늘 작은 아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어정쩡한 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 웃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은 일이 없다.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왜 웃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난 또 딱히 안 웃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이 그렇게 종종 말하고는 한다.
"이렇게 환하게 웃으니 좋아 보여."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이고. 안 웃고 있었구나. 놀랍다. 내가 모르는 모습이다. 그때마다 밟힌 지렁이처럼 입술이 꿈틀꿈틀거린다.
"매일 웃고 있으니 오늘은 입가 주름도 방지할 겸 무표정으로 지낼게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입가에 팔자주름이 생겼다. 남들이 웃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주름은 왜 생기는가.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늘 아빠의 미간 주름에 반응했었다. 퇴근하시는 아빠의 미간 주름에, 화들짝, 오늘은 조심해야지. 그때마다 다짐하곤 했었다. 미간 주름이 잡힌다면, 그건 아빠가 기분이 안 좋으시고 또한 내게 폭격 같은 잔소리를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어떤 말을 걸어도 미간 주름이 잡히면 말을 삼갔다. 그래서 점점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미간 주름의 어폐다.
그런데 거울을 보니 세상에나. 내게도 미간의 주름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칼로 도려낼 수도 없고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다. 미소 짓지 않음의 증거가 여기다. 얼굴의 노화를 방지한다는 얼굴 스트레칭을 따라 한들 딱, 거기서 멈칫거린다. 아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볼걸 그랬나. 서랍 속에 넣어둔 괄사를 꺼내어 괜히 만지작 만지작 거린다. 괄사로 펴 볼까나.
그래서일까. 큰 아들은 무표정이다, 대부분. 사춘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래도 나는 엄마이기에 아들을 볼 때마다, 양 집게손가락을 아들 입꼬리에 가져가서는 위로 치켜세우며 '스마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들은 멋쩍은 듯이 한번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슬며시 감으며 미소 짓고 스탑.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아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 건지. 미소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 여유가 없나 보다. 보기에도 잘생긴 얼굴. 웃으면 좋을 텐데, 그럼 내게 물려받은 보조개가 한껏 드러날텐데 때아닌 욕심을 부려보지만 무표정의 내 얼굴을 생각하고는 금방 마음을 접는다. 내가 웃어야 아들이 웃지. 아들 없는 틈을 타서 괜히 입을 위아래, 좌우로 움직여보고는 1분이라도 미소를 띠어보자며 연습한다.
반면 작은 아들은 웃는다, 매일. 너무 사소한 것에 우는 만큼 자질구레한 것에 웃는 바람에 뭘 할 수가 없다. 이런 아들은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 웃어요.' 하며 내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치켜세운다(형한테 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그리고는 내 옆에 와서 '뿌잉뿌잉'하고 애교를 부린다. 본인 양손을 주먹 쥐고 볼 옆에 붙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10살 된 아들이 엄마 앞에 와서 웃으라고 하는 상황이. 그 애교에 무표정이 사라지고 감춰져 있던 미소가 환하게 드러난다.
자율학습하는 시간에 책장에서 '향수'(파트리크 쥐스킨트 저)를 꺼내어 읽던 중학생 사춘기 소녀. 짐짓 이 두껍고 어려운 소설을 읽는다며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였을까. 늘 고요히 책을 읽고 한적하게 잔잔함을 추구하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환경의 모든 것이 진지하다. 농담도 싫어한다. 실없어 보이기도 싫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보다는 묵직한 무거움으로 보이길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렇게 '무한도전'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했었다. 그 프로그램만큼 재미있고 나를 웃게 하는 것도 없었더랬지. 대리만족이랄까. 우스워 보일까 봐하지 못했던 행동과 말들을 하는 게.
▲ 출처 : 유튜브 랄랄ralral 프로필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뀐 만큼, 요즘은 깔깔깔, 이 유행이라고 한다. 알고 보니 젊은 유튜버가 아줌마로 분장하여 아줌마 행동, 말투 등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분이 '깔깔깔'하고 웃는단다. 그래서 그 웃음이 유행이다. 젊은 친구들이 그리 좋아한다며. (우리 때는 자우림의 '하하하' 노랫소리가 즐거움이었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도 웃을 일이 없나. 그들이 마음이 곤하고 좌절하여 크게 한번 '깔깔깔'하고 웃어보고 싶을는지도.
깔깔깔, 나는 웃어보지 못한 소리. 너무나도 낯선 글자, 깔깔깔. 그 유튜브를 봐 볼까. 깔깔깔, 하고 웃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예전 무한도전 플레이를 다시 재생해 볼 뿐이다.
"미소는 전기보다 적은 양으로 더 많은 빛을 만들어낸다."
-아베 피에르
한 줄기의 빛으로도 온 집안을 밝힐 수 있다 한다. 이처럼 한 번의 미소로 모든 것을 빛처럼 환하게 할 수 있다. 마음도, 환경도. 나를, 우리 가족을, 더 나아가 이 세상을(포부가 너무 큰가.). 돈을 소비하지 않아도 되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따로 낼 필요도 없다.
그저. 입가에 힘을 주어 입술을 약간 벌리고 양 볼을 조금만 위로 댕겨주면 된다. 눈을 살짝 작게 뜨는 것도 좋다. 이렇게만 웃는다면 우리 큰 아들도 매번 미소 짓는 사람이 될 텐데. 작은 아들도 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텐데.
거울 앞에서 그리 웃어본다. 낯설기도 하지만 얼굴이 눈이 부시다. 그래, 웃는 게 대수냐. 울고만 살 이유도 없듯이 안 웃고 살 이유도 없다.
글을 쓰는 내내 안면근육을 풀어주며 미소 짓는 연습을 한다. 이제 하교하는 아들들에게 한껏 미소를 보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