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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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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 여행자 Dec 17. 2024

사랑스러워

엄마의 반성문

<대문사진 출처 : pixabay. Victoria AI-Taie>


 "귀여워. 봐도 봐도 귀여워. 사랑스러워."

 버스를 타고 종로를 가는 길이다. 출근을 하거나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는 조용한 버스 안에서 어떤 여자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바로 뒷좌석에 앉은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아이는 대답이 없다. 그 상황이 궁금해 뒤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돌아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엄마의 사랑스러운 말을 들은 아이는 엄마를 향해 방긋 웃었으리라. 뒷좌석의 훈훈한 따스한 기운이 내게도 느껴진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더 갔을까. 시간이 흐른 뒤 엄마는 아이에게 또 말한다. 

 "왜 이렇게 귀여울까. 사랑스러워."

 라고. 짐짓 그 아이가 정말 귀엽게 생겼는지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궁금했다. 실제적으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이가 율동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닐뿐더러 잠자코 버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보일리는 없을 것 같고. 유리창을 비스듬히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이의 얼굴이 보일까 고개를 조금씩 움직여봤지만 보일리가. 턱도 없다. 버스가 달리고 정류장에 정차하는 그 약 15분 동안의 시간 동안 엄마는 아이에게 이 말을 4번이나 했다. 귀여워, 사랑스럽다고. 그 말을 앞 좌석에서 들으며 손꼽아 셌냐고. 그렇다. 잠잠히 창밖을 보며 내릴 버스 정류장을 놓칠까 노선표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에 엄마의 사랑스러운 말투와 말이 내 귀에, 내 마음에 못 박듯이 쿵쿵 새겨졌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말을 하던 아이와 엄마는 000 정류장에 도착하자 손을 꼭 잡고 내렸다. 얼핏 보건대 아직 6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였다. 엄마는 아이가 무엇이 그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웠을까. 얼마나 사랑스러웠길래 버스 타고 오는 내내 아이에게 사랑의 말을 건넸을까.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가게 간판을 보며 이건 뭐야, 저건 뭐야라고 물어봤을 뿐. 아이가 엄마에게 딱히 애교를 부린 것도 아니다. 그저 엄마는 아이가.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버스 타기 30분 전을 회상해 보자. 날씨가 추워져서 두꺼운 점퍼를 입고 가기 싫다는 아들에게 '날씨 추워. 감기 걸려.'라며 점퍼 입기를 권했다. 하지만 아들은 이 옷과 저 옷은 좋은데 이 두꺼운 점퍼는 싫단다. 여름용 점퍼와 가을용 점퍼는 좋은데 왜 굳이 겨울용 점퍼가 싫다고 할까. 

 "엄마, 오늘만 이 점퍼 입을게요. 내일 겨울 점퍼 입을게요. 옷이 두꺼워서 불편해요. 이것도 점퍼잖아요. 아, 싫어요."

 영하 기온이 웃도는 날씨여서 겨울 점퍼에 목도리도 해야 할 판국에 가을용 점퍼를 입겠다니. 아이의 고집스러운 말과 태도에 당황은 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늘 새롭게 입게 되는 옷의 변화에 대한 아들의 반항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손목까지 옷이 닿지 않는다며 반팔 입기 싫다고 징징 거렸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옷이 손목에 닿는다며 긴팔 입기 싫다고 주저했다. 이번에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데 두꺼운 점퍼를 입기 싫다고 반항하는 중이다. 하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숨이 턱턱 막힌다. 이제 등교시간 예비종 울리기까지 10여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냥 좀 입지, 저 징징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줘야 하나. 듣기조차 싫다. 속에서 활화산처럼 용암이 들끓기 시작했다.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붉어지며 큰 목소리가 폭발할 것 같다. 지겨움이 몰려온다. 한두 번이 아니다. 항상 계절이 변할 때마다 윗옷, 아래옷, 양말, 점퍼 등 하나하나 옷의 변화를 맞추지를 못한다. 애써 무시하고 싶지만 틱, 틱, 틱 시계초침 소리가 내게 초조함과 등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소용없다.

 소리 지르기 전에 마음이 갈팡질팡하여. 아들의 혼잣말과 행동이 보기도 듣기도 싫어 끝내 먼저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모르겠다. 일주일 전부터 미리 다음 주에는 이 옷을 입을 것임을 쇼핑호스트처럼 예고라도 해야 하나. 급변하는 날씨 속에 어찌 그 모든 날씨를 맞춰가며 예고한단 말인가. 계절에 맞춰 옷을 입는 건 학교에서도 배울 텐데, 왜 우리 아들은 그때마다 변화가 싫다고 우는지. 이건 단지 옷일 뿐인데. 


 1층 밖에서 아들을 기다린다. 먼저 나왔지만 미처 아예 모른 척 버스 타러 나갈 수는 없었다. 1층 문이 열린다. 아들은 겨울용 점퍼를 입고서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며 구시렁거리고 있다. 그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휴. 문이 열리자 눈이 마주친다. 분명 이마 미간에 주름을 잡고 화난 눈빛의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아들은 엄마의 표정을 흘깃 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 뽀뽀. 안녕. 파이팅!" 

 을 외친다. 이는 항상 아들이 학교 가기 전에 하는 루틴이다. 뽀뽀하고, 안녕 손을 흔들고, 양손 두 주먹을 꼭 쥐고 파이팅 외치는 것이. 이 상황에서도 아들은 엄마에게 뽀뽀를 요구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응원을 받길 원한다. 쿨하게, 아들은 겨울 점퍼에 대한 화를, 겨울옷에 대한 변화의 불안을, 집에 버리고 왔나 보다. 하지만 아직 마음에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지도 못했다. 찌릿하고 몸이 굳어버렸다. 아들의 인사에 환하게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아들은 뽀뽀, 안녕, 파이팅 외쳐줄 때까지 10번이고 반복할 것이다. 결국,

 "그래. 뽀뽀, 안녕. 파이팅!" 

 라고 답해주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겉으로는. 그러나. 아들이 인사하고서 저만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자니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겨울 점퍼를 입고 나올 것을. 그러면 따뜻할 것을. 그리고 서로 화내지 않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할 것을. 순순히 겨울 점퍼를 입으면 안 되는 거였나. 굳이 꼭 저렇게 매번 볼멘소리를 하고 엄마에게 반항을 해야 할까. 심장은 북을 치듯 둥둥. 아들의 뒷모습이 밉다. 

 "학교 가서 또 어제처럼 친구랑 다퉈라, 아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독을 내뿜었다. 슉슉. 아침의 화가 들끓다 못해 어제 저녁의 불안까지 불러들였다. 아들은 엄마를 돌아보며 

 "엄마는 왜 갑자기 그 말을 해요."

 라며 울먹거린다. 아들의 얼굴이 울상이다. 

 "다시 그런 말 하지 마요."

 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선다.

 



 화를 삭이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곱씹고 있었는데 버스를 탄 뒷좌석에서 아이를 향해 연신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엄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와 전혀 다르다. 물론 상황도 달랐지만 그것을 다 떠나서 전혀 다른 엄마의 포지션이었다. 한 엄마는 아이에게 사랑을 말로써 전하는 반면, 한 엄마는 아이에게 독화살을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뿜어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인내심의 부족이다. 아들이 그렇게 행동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들을 침착하게 말로써 잘 설득했어야 했다. 그리고 아들이 짜증 섞인 볼멘소리를 했더라도 잠자코 듣고 있어야 했다. 그것조차 어려웠다면 이미 집을 먼저 나서버린 후 1층에서 만났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게 웃는 아들에게 그저 화답해 줬으면 됐다. 엄마의 뽀뽀와 인사, 응원까지 받으며 등교하기로 마음먹은 아들의 등을 보며. 어제 잘못까지 거느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모든 게 지나가버린 상황이지만 아직도 마음의 폭풍우가 진행 중이다. 과연 아들은 이 폭풍우를 외면했을까, 잠재웠을까, 이겨냈을까. 그 폭풍우의 마음을 가지고 학교 생활은 잘하고 있는가. 

 사랑의 부족이다. 조금 더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줬어야 했다. 아니 사랑해야 한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저 안아주고 옷의 변화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줬어야 했다. 그것조차 어려웠다면 굳을 얼굴로도 학교 등굣길을 같이 걸었어야 했다. 팽 돌아설게 아니라. 엄마인데 아들을 애써 모른 척할 필요도 무시할 권한도 없었다. 과연 아들은 이 짧은 아침시간에 집과 엄마에게서 평안함과 사랑을 느꼈을까, 따스했을까, 행복했을까. 아니다. 아주 괴롭고 냉정한 엄마만을 기억했으리라.


 우연히 만난 버스 뒷좌석의 엄마의 말과 행동으로서 그저 흐르는 눈물을 애써 삼킬 뿐이다. 언제쯤,

 "우리 00은 귀여워. 보고만 있어도 정말 사랑스러워."

 라고 언제든지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수아는 존재 자체로 빛나는 아이야."


-김유라 외 7저. 『 나의 상처를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

 


 아침에 아들을 깨울 때나 재울 때는 안고 기도해 주며,

 "00아, 엄마 아들이어서 고마워. 사랑해."

 라고 사랑을 속삭이지만. 정작 깨어있는 시간. 밥 먹고, 학교 가고, 공부하고, 노는 시간에 틈만 나면 분노 버튼을 눌러버리는 아들에게 종종 미움을 외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아들이 분노 버튼을 누르든, 귀여움 버튼을 누르든. 아들은 존재 자체로 빛나는 아이이며 우리 가정의 선물, 보물인 것을. 아들의 존재를 바라보고 사랑과 여유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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