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운전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운전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 올 때 차를 탁송하여 고이 모시고 왔다. 바다를 건너고 먼 길을 달려 육지 집 지하주차장으로 도착했다. 하지만 차는 며칠 째 지하주차장에서 한 바퀴도 굴리지 못했다. 차들이 별로 없는 동네 한 바퀴 돌아볼까. 가까운 옆 동네 마트까지만 운전해 볼까. 때마다 결심은 섰지만 쉽게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글쎄. 익숙하지 않은 동네이기도 하고 집 앞이 바로 자동차 전용도로 즉 강변북로와 자유로가 펼쳐져 있기 때문일까. 무려 8차선인 도로에서 신호 없이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운전대를 포기하고 걸어 다니는 것을 선택하는 게 빠른 것 같기도.
남편도 출퇴근 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무려 차 2대가 지하 주차장에서 잠드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차를 팔자. 그래도 주말에는 차가 필요하니 한대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결국 필자의 하얀색 차를 팔기로 결정했다.
결혼한 지 2년 차 됐을 때 구입한 중형차다. 3년 뒤 남편이 다시 차를 구입했을 때부터 홀로 몰고 다닌 차다. 아이들 유치원 픽업 때나 장을 보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개인적으로 시내를 이곳저곳 구석구석 몰고 다녔다. 눈감고도 그려지는 도로. 그 도로를 신나게 다녔음은 물론, 여름이면 아이들을 태우고 이 바다 저 바다 놀러 다니기도 했다. 차 바닥에는 하얀 모래가 가득가득.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 하얀 차. 딱히 차의 애칭은 없었지만 약 6년간 필자의 기동력이었던 소중한 자동차다. 그 기동력이 육지에 와서 생기를 잃어버릴 줄이야. 그 차는 육지에서 생소한 길을 달려 보기를 원했을까. 아. 생기를 잃어버린 하얀색 차는 곧 남의 손에 팔려갔다. 그렇게 여기서 한번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떠나갔다.
운전면허증은 20살에 1종 보통으로 땄다. 딱히 운전 면허증을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생활 첫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갔더니 느닷없이 부모님께서 운전 면허증을 따라고 권유하셨다. 그래서 덜컥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필기시험은 통과. 실기 시험은 1종 보통으로 내게 주어진 차는 하얀색 트럭이었다. 이 트럭을 어떻게 운전하지. 타본 적도 없는데. 짧은 다리가 서글픈 나머지 운전대 가까이 의자를 딱 붙이고는 손과 다리를 벌벌 떨며 장내 연습에 들어섰다. 제일 어려웠던 건 기어를 변환하며 속도를 높이는 구간. 변속할 때 제때 기어를 바꾸는 게 어려웠다. 왼쪽 발로 클러치를 밟았다가 떼면서 오른발은 엑셀로 밞아야 하고. 그 때 기어를 바꿔야 하는데. 뭔가 왼발과 오른발, 손이 따로 놀았나보다. 그때 선생님은 50대 정도의 남자분이셨는데 몇 번을 가르치다가 결국 내뱉은 말은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 실업계 나온 거 아냐. 왜 이해를 못 해."
였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는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다. 그리고 제주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다. 아시다시피 제주는 '고등학교'로 학연이 작용하기에 운전 선생님 말씀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여하튼 그 호통 소리에
"아니에요. 저 1대 20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인문계 00 고등학교 나왔어요."
화끈거리는 얼굴로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도 우문우답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랴. 1종 차량의 변속이랑 고등학교랑 무슨 상관이람. 여하튼 00 고등학교 명성을 먹칠한 것은 아닌지 아님 그 선생님께서 만나온 인문계 학생과 실업계 학생의 차이는 운전실력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그 구간을 지날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윙윙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장내 시험도 도로 연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 번에 합격했다. 1종 보통 운전면허증. 잊을 수 없는 꾸중(호통, 욕)과 함께 얻은 자격증이었다. 그 이후로 이 면허증을 가지고 친정어머니의 차를 몰고 다녔다. 가끔 친구들과 서쪽 해안도로(제주시~애월) 드라이브를 다니거나. 주로 남동생 과외 및 학교 기숙사 라이딩을 전담했다. 그래서 제주에서 흔히 말하듯 렌트가 '허'만 조심하면 별일 없기에 곧잘 운전하고 다녔다.
운전 면허증만 1종 보통이었지 사실 그 이후로 트럭을 운전해 본 적은 없다. 클러치가 무엇이고 기어가 무엇인가. 까마득해진 1종 운전 실력이다. 그럼 이제 1종 운전면허증을 가진 자가 육지에서 실력을 펼쳐볼 텐가. 집 앞으로 차들이 쌩쌩 달리는 8차선의 강변북로와 올림픽 대로를 보고 있노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담력이 부족하다. 저 수많은 차들 사이로 어찌 운전하려나. 그저 가속페달만 밟으면 되려나. 아니다.
종종 서울이 아닌 지방에 놀러 오가며 문산 고속도로, 경북 고속도로, 동해 고속도로들을 몇 번 다녔었다. 분명 고속도로이건대 도로가 어찌나 복잡한지. 도로를 달리다가 분기점 몇 미터 전 오른쪽 도로로 빠져야 한다. 내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알려줬지만 지금 빠져야 하나 조금 있다가 빠져야 하나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로에 그려진 색깔 유도선. 이 유도선을 생각해 낸 공무원이 표창받을 만큼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준 건 명백한 사실. 이 색깔 유도선으로 교통사고 사망자도 현저히 줄었다고 한다. 내비게이션이 있다 한들 쌩쌩 달리다가 갑자기 오른쪽 도로로 빠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색깔 유도선으로 미리 빠져나갈 도로와 진입할 도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와 같이 색깔 유도선도 잘 파악해야 하지만 합류 지점에서는 늘 조심해야 한다. 합류하고서 바로 좌회전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 합류도 어렵게 차 사이로 끼어들었는데 어찌 2,3개의 차선을 변경하여 좌회전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필자의 경우 운전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처음 육지에 와서 (남편이) 운전할 때 우리는 종종 고속도로를 잘못 타거나 차선을 잘못 타서 빙빙 돌아가기도 일쑤. 그나마 다행인 건. 육지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게 깜빡이를 켜며. 차선 변경을 위해 끼어들어도 '빵빵' 경적을 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끼어들 수 있도록 앞 차와의 거리 '간격'을 벌려준다는 사실. 얼마나 친절한 사람들인가.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고, 자동차가 끼어들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는 사실에 놀란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라웠는지 주말에 나들이 갈 때면, 도로에서 '역시 제주와 달라.'라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사실. 배려가 깊은 육지 사람들.
이뿐이랴. 우리는 강변북로를 타고 용산까지 가야 하는데 눈이 펑펑 쏟아진다. 창밖을 보니 온통 하얀 눈 세상이다. 눈길 운전은 미숙한 데 갈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천천히 달려보지 뭐. 두려움과 걱정으로 차를 조심히 몰고 나왔는데 웬걸. 자동차도로의 눈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다. 이미 새벽부터 아니 지난밤부터 제설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제설전진기지'에 있는 수많은 제설차들이 이 눈들을 다 치웠으리라. 지나갈 때마다 제설전진기지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자동차전용도로의 눈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설차들을 주차해 둔 기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눈이 와도 자동차전용도로의 차들은 걱정 없이 쌩쌩 달리는구나. 이 따뜻한 배려와 고생스러운 수고. 참 그러고 보면. 육지는 모든 게 편리하고 빠르지만 뒷배경에는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게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도시가 이렇게 원활하게 돌아가는구나.
도시의 원활함에 익숙한 지인들이 말한다.
"그래도 운전해 보세요. 조금씩 하다 보면 쉽게 운전할 수 있어요. 도로가 다 똑같죠, 뭐."
"아이들 커서 학원 라이딩 할 일 많을 텐데요. 운전하면 엄청 이동하기 편해요."
색깔 유도선으로 이미 가야 할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혹시 차선을 바꿔야 할 타이밍에 낑낑거려도 다른 운전자들이 배려있게 차 간격을 벌려주고. 눈이 와도 제설차들이 말끔히 눈을 치워주는 수고로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저 보조석에서 앉아 남편 운전 모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만 해댈 뿐. 차 한 대는 여전히 지하주차장에서 평일 잠을 자고 있으며. '1종 보통'의 운전면허증은 장롱 면허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다시 운전할 수 있을까.
오히려
차가 끼어들 수 있도록
거리 간격을 벌려준다
덧. 제주인들은 20살이 되자마자 운전면허증을 획득한다. 좁은 지역이지만 버스로만 다니기에는 불편한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제주에서 만난 육지인들은 운전면허증이 없는 분들이 허다했다. 특히. SKY대를 나오고. 전문직종인. 남자분들께서. 왜 (기본적인) 운전면허증이 없으세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서울은 지하철로 다 다니잖아. 굳이 차 운전할 필요가 없어.'라는 공통된 말을 하곤 했다. 육지에 와보니. 정말 '역세권'이 강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