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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음미하시나요

문화생활을 즐기다

by 달빛의 여행자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는 '태권도 V'. 딱히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당시 미스였던 고모가 동문로터리에 있던 '코리아 극장'에 불러내어 동갑인 남자 사촌과 함께 보여준 영화였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렴풋이 코리아 극장 2층 매표소에서 '태권도 V' 팸플릿을 살펴봤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후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매달 영화관을 들락날락거렸고, 학교 도서관 DVD 실을 이용해 홀로 '아카데미 수상'작품들을 소소하게 관람했다. 영화관을 가야 하는 예전과 달리 지금은 집에서든 지하철 안에서든 핸드폰만 있으면 전 세계 각국의 영화는 물론 다큐멘터리 등을 손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영화' 문화생활은 보편화가 되었다는 사실.


반면. 문화생활에 처음으로 충격을 받은 건 바로 미술관. 20대 때 미술관을 처음 방문했던 곳은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이곳에서 본 전시회는 '샤갈'전시회. 미술에는 소질이 없고 천부적인 재능도 없다 보니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우연찮게 청년의 때에 미술작품에 대해 책으로 보게 되었고, 서울에 여행 온 김에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했다. 그때 처음 접한 것이 '도슨트'해설과 작품을 해설해 주는 '오디오 가이드'였다. 미술관이 첫 방문이고 어떻게 그림을 봐야 할지 모르니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했다. 손에 오디오를 들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작품의 번호를 누르면 작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한 작품 한 작품 천천히 살펴보면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상세한 설명을 귀담아들었다. '아, 이렇구나. 이 그림은 00을 표현한 것이구나.' 그렇게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미술 작품에 대해 한 발짝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이런 시스템에 충격을 받았냐고. 그보다 놀라운 건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 관람객이었다. 화려한 미술관 안에서 몽환적인 그림을 관람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분들. 물론 노인분들이 미술관에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술관은 남녀노소 누구나 방문가능하며 자유롭게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20대 때 미술관을 첫 방문해서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어폰으로 들리는 해설에 집중하던 필자는. 그 사이를 여유롭게 지나다니시며 샤갈의 작품을 관람하던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익숙한 듯 한결같이 한 손에 오디오를 들고서 이어폰을 한 귀에 꽂고는 서로 그림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그렇다. 이분들에게는 미술관 관람이 익숙하고 친숙한 문화였던 것이다. 우리가 여름 한철 우뭇가사리, 톳, 보말을 채취해서 집에서 요리해서 먹듯. 그 이후로 20년이나 지났지만 그때 미술관에서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관람객들의 낯설고 신선한 모습은 잊히지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를 계기로 필자는 미술관의 매력에 빠져들어 신혼여행도 미술관 투어로 떠났으며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미술관 방문도 즐겨한다.


비단 이뿐이랴. 처음 본 뮤지컬은 예림당 아트홀에서 보았던 '피노키오' 뮤지컬이다. 서울로 여행 온 김에 아이들과 함께 뮤지컬을 보자 하여 선예매를 했다. 관람객들이 대부분 가족단위로 우리 아이들(그 당시 4살, 6살) 또래의 아이들과 부모들이었다. 관람석에서 본 무대 위 뮤지컬은. 정말. 진짜. 뮤지컬이었다. 환상 그 자체. 배우들마다 역할에 맞게 분장을 하고 복장을 갖춰 입고. 이마에 마이크를 달고. 대사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생생한 라이브 뮤지컬. 그 당시 아이들은 어려서 잘 기억 못 하겠지만 우리 부부는 적잖이 큰 충격을 받았다. 와 이게 뮤지컬이구나. 이 수많은 아이들이 고퀄리티의 뮤지컬을 보고 있구나. 이런 문화생활이라니. 육지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문화가 너무 부러웠다. 시샘이 날 정도로. 뮤지컬의 재미를 느낀 우리 가족은 그 이후로 여행할 때마다 서울에서는 '피터팬', '수박 수영장', '마틸다', 부산에서는 'LION KING'을 관람했다. 뮤지컬을 본 소감은 말 그대로 어메이징. 어쩜 배우들은 그렇게 춤을 격렬하게 추면서도 숨찬 소리 없이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며. 그 긴 시간 동안 대사를 보지도 않고 연기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외국에서 온 'LION KING' 뮤지컬은 무대 앞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노래와 배경음악 연주가 라이브라니. 이렇게 육지에서 '뮤지컬'에 빠져든 우리 가족은 '제주에서 열리는 뮤지컬'을 한 껏 기대했지만 실망을 금치 못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녹음된 MR을 틀어놓고 움직이는 연기만을 하며 립싱크를 했을 뿐. 그 음향조차 삑사리가 나고 무대장치, 소품도 기본만 갖췄을 뿐. 모든 게 아쉬웠다. 지역의 한계인가. 제주에서도 퀄리티 좋은 뮤지컬을 생생한 라이브로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함께 관람하던 아이들도 뮤지컬의 생동감 넘치는 매력에 반했을 텐데. 결국 제주인들도 '제대로 된 뮤지컬'에 빠져들 텐데.

▲ (좌) 알오름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중) 올레 3코스 신풍 바다목장. 귤 껍질 말리는 모습 (우) 동굴. 장소는 비밀. ⓒmoonlight_traveler


물론.

제주에도 문화생활이 있다. 제주에는 천혜의 자연경관이 있지 않은가. 섬 중심에는 해발 1900m의 한라산과 360여 개의 오름 그리고 사면이 푸른 바다이며 돌은 현무암으로서 만리장성보다 길다는 돌담이 형성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자연을 오롯이 누리게 된 것은 20살 때부터였다. 대학생이 되자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만이 아시는 오름을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셨다. 항상 길이 없는 오름을 다니셨기 때문에 옷이 가시덤불에 찢어지고 피부에 긁히는 건 다반사. 없는 길로 걸어가다 길을 잃은 적도 많다. 그래서 오름을 등반했다 하면 기본 4시간 이상으로 걸었다. 걷기만 했느냐. 그건 아니다. 야생화에 관심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보이는 꽃마다 꽃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고. 곳곳에 보이는 더덕, 두릅, 고사리, 양해 등을 채취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단련된 시간과 훈련된 두 다리로 그 당시 제주에 '올레길'이 만들어지자 홀로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버스 타고 1코스, 2코스, 3코스. 모든 올레길 코스를 다 걸었다. 기본 5시간 이상은 걸렸다. 점심도 초코바 하나, 물 한 병이었지만 mp3에 흘러나오는 찬양을 들으며 바다와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걸을 때마다 제주 지형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서쪽 지역 대평, 화순 올레길을 걸을 때는 제주가 아닌 다른 곳을 여행하는 것 같았다. 드넓게 펼쳐진 밭 사이로 세워진 돌담들과. 그 밭에서 키우는 듯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작물들. '시'에서만 자란 필자에게는 다소 낯선 풍경. 길거리에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으며 털털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경운기 한대를 보았을 뿐이다. 오, 경운기라니. 이조차도 생소했다.

이렇게 친정아버지와의 오름과 혼자만의 올레길을 발판 삼아. 결혼을 하여 가정이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나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남편과 아이들을 이끌고 오름과 제주 곳곳의 자연경관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200여 개의 오름을 걸어 올랐고. 오를 때마다 뱀, 도마뱀, 장수풍뎅이, 노린재, 말, 소, 노루 그리고 단풍, 눈을 보았으며.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만끽했고. 제철마다 고사리, 두릅, 바지락, 맛조개, 보말을 캤다. 이 모든 추억은 우리 가족 앨범 속, 일기장에 담겨 있다. 또한 각 사람의 기억 속에 있겠지. 20대가 되어서야 아버지와 함께 다니며 제주의 자연 문화를 누렸던 아쉬움을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이곳저곳 풍성한 제주의 자연을 누리도록 했다. 아니 음미하고 즐겼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이토록 제주를 맘껏 누리고서야 제주를 떠나게 되었고. 이제는 도시에서 '도시 문화'를 음미하고 즐기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아직은 제주만큼 풍성한 자연과 그 추억은 없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문화 즉 영화, 미술관, 뮤지컬, 연극, 도서관 그리고 박물관이 곳곳에 있어서 이를 누리는 것이 생소하며 즐겁다. 낯설기에 좋은 것일까.


▲ 광화문 책 광장, '책 봐, 구니'에 책들이 담겨 있다 ⓒmoonlight_traveler

덧붙이자면 도서관도 다양해서 볼거리가 많다. 꼭 열람실과 자료실이 있는 곳뿐만이 아니라 도서관 안에 푹신한 빈백이 마련되어 있고 자유롭게 누워서 책도 볼 수 있다. 특정한 주제 예를 들어 미술,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주제별로 소장하고 있는 특색 있는 도서관도 있다. 책이 도서관에만 있으랴. 놀랍게도 봄과 가을만 되면 책들이 밖으로 깡충깡충 토끼처럼 뛰어나온다. 어디로. 광화문과 시청 광장, 청계천과 한강공원으로. 따스한 햇살과 산뜻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며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푸릇푸릇 잔디밭에 앉아 읽는 책은. 만화책, 소설책, 시집 어떤 책이든지 다 좋다. 슬슬 잠이 오는가. 책을 머리맡에 두고 누워 있어도 좋다. 모든 자연이 책과 사랑에 빠지길 염원하고 있는 듯.



대학 때 '거창'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잠옷 바지를 걷어올린 필자를 보며 '모내기하러 가냐'라고 말했었다. 논보다는 밭에 익숙했기에 '책에 나오는 그 모내기'라고 대답했을 때 그 친구는 크게 웃어댔고. 어렸을 때 개구리 잡아서 뒷다리를 구워 먹어본 적 없냐며 의아해했다. 또 함께 영화관을 갈 때마다 자기가 사는 거창은 서울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한 달 뒤에나 상영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복지관에서 기타를 배울 때는 학생들 대부분이 5,60대의 어머님 아버님이셨다. 그중에서도 옆자리는 80세 할머니셨다. 나란히 앉았기에 쉬는 시간에 할머니와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서울에서 사시다가 제주로 이주 오셨다고 하셨다. 지금 사시는 곳에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복지관에 올 수 있는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할머니께서는 이 복지관에서 기타뿐만이 아니라 하모니카도 배우고 계셨다. '대단하세요.'라는 필자의 칭찬에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경로당에 가도 할 게 없어. 다들 앉아서 TV만 본다고. 경로당에 신문 하다못해 광고 전단지가 굴러다녀도 아무도 펼쳐서 읽어보려 하지 않아. 이해가 안 돼. 그래서 여기 와서 기타도 배우고 하는 거야."

그 할머니 말씀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샤갈 미술작품을 관람하던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들을 떠올렸다. 각자 다른 지역, 다른 세대였지만 문화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좁은 대한민국 땅이지만 각 지역의 환경이 다르다. 따라서 지역에 따른 문화와 생활은 지역의 특성과 자원을 반영하며 그 지역 사람들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생활을 통해 각자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며 정신적 만족을 제공한다. 제주에서 육지까지. 가까우면서도 먼 곳, 두 지역을 살아가며. 그저 제주에서 제주만의 문화를 즐기고. 육지에서는 또 다른 색다르고 흥미진진한 문화를 음미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문화가 부러웠다
시샘이 날 정도로








덧. 육지에서 즐기는 문화생활이 궁금하시다면 제 브런치 '보통의 하루 여행기'로 놀러 오세요.

'보통의 하루 여행기' https://brunch.co.kr/brunchbook/a-typical-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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