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 우리 동네에는 연예인들이 산다. 주변에서 들은 연예인 이름만 들어도 10명이 넘는다. 배우, 가수, 개그맨, 감독, 유명 유튜버 직종도 다양하다. 우리 집 옆동에는 가수가 살고 아파트 헬스장에는 배우가 종종 보인다고 한다. 인기 보이그룹 아이돌 숙소도 있다. 다른 이들의 목격담만 들었을 뿐 그 수많은 연예인들 중 직접 본 연예인은 단 한 명뿐이다. TV에서 많이 봤어서 그런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왠지 그녀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천천히 걸어가며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생각했던 그녀가 맞다. 오, 신기해라. TV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직접 보게 되다니.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다. 연예인들이 사는 동네라 맛집 카페든 식당을 가면 연예인들의 사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가게들을 방문할 때마다 연예인이 있나 없나 이리저리 훑어보지만 못 알아보는 건지 타이밍이 맞지 않는 건지 쉽게 볼 수는 없다. 아쉽다. 연예인을 직접 봤다고 해서 사인이나 사진 요청도 할 수 없는 대문자 I면서 말이다.
이전에 본 연예인은 김포-제주행 비행기에서 우리 앞자리에 앉았던 배우 문근영 씨, 김아중 씨, 김지수 씨. 청주 공항에서 광고 찍던 배우 이병헌 씨. 문경을 여행하며 드라마 촬영 장소에서 만났던 배우 김갑수 씨. 이 정도다. TV에서만 보던 그들을 직접 보게 된다면 진짜 그들인가 아닌가 의아하다. 조금은 닮은 듯 다른 듯 싶으니까. 여하튼 그렇게 육지에서 여행하던 중에 그들을 만났던 일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눈앞에 TV화면이 펼쳐지는 듯 신비롭고 생동감이 넘치는 생생한 현장이다.
비단 연예인의 생생한 목격담을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육지에 와서 살아보니 연예인은 쉽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쇼핑몰을 갔는데 보디가드들이 서 있다. 누가오나 보니 팝업 행사에 브랜드 모델 여가수가 사인회를 연단다. 팬들의 일명 '대포 카메라'도 등장했다. 이번에는 영화관을 갔더니 한 장소에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린다. 살펴보니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시사회란다. 유명한 배우들이 줄지어 나타나 연신 찍어대는 카메라와 군중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디를 가도 연예인은 가까이서 혹은 멀리 서라도 볼 수 있다.
연예인을 쉽게 볼 수 있어서 그런가. 정말 연예인이 되고 싶거나 취미를 갖거나 혹은 운동차원에서 시작하거나. 여러 가지 동기로 연예인을 준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있다. 예로 이 작은 동네에도 보컬 학원, 댄스 학원이 있다. 하물며 싱어송라이터가 직접 가르쳐주는 기타 학원도 있다.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연예인'이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서는 듯하다. 그저 뜬구름 잡듯이 '커서 연예인 될 거예요. 가수요.', '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막연한 꿈이 아니다. 육지에서는 실제로 연예인이 운영하는 학원도 있고 직접 소속사와 연결되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는 헛된 꿈이 아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다. 비단 연예인뿐이랴. 방과 후에 체조를 배우며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을 보면 '미래의 손연재 선수' 같고, 피겨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하는 아들 친구를 보면 '미래의 김연아 선수'같고, 축구 원정 훈련을 간 동네 학생을 보면 '미래의 손흥민 선수'같다. 다들 미래의 꿈과 직업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과정. 이토록 다양한 꿈을 가진 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발판이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 '제주 아이들은 꿈이 없나요.',라고 묻겠지만 그건 아니다. 다양한 꿈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 꿈에 한 발짝 다가서기가 어려울 뿐. 꿈을 현실화시키려면 적어도 그 꿈을 펼칠 수 있는 장소와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셔야 하고, 그 장소와 멘토를 찾다 보면 결국 육지로 와야 하고, 육지에서 거처할 집 혹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왕복 비행기표가 필요하다. 이를 다 갖추기 위해서는 차라리 육지로 이사 오는 게 나을지도. 저가 항공이 있다 해도 매번 왔다 갔다 하는 비행깃값은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 지방에서 육지로 올라와 합숙 생활을 하며 연습생 생활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제주에서의 직업은 대체로 한정되어 있다. 관광지답게 관광종사자, 자영업자 그리고 공무원, 병원관계자. 대부분 이뿐이다. 필자의 동창을 봐도 이 네 개의 범위 안에 속하는 직업군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 친척들의 직업을 살펴봐도 이 안에 속한다. 웃프지만 정말 그렇다. 한정된 지역 내에서의 한정된 직업. 생각건대 지역의 특성상 한정된 범위도 있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자녀들 또한 제한된 직업을 꿈꿀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교육자 집안 안에서 자란 필자와 동생들도 교육자를 꿈꿨고 결국 교육자와 공무원이 되었으니까.
▲ (좌) 출처 : Pixabay. ⓒVita_C. 레드 립스틱의 다양한 색깔 (우) 출처 : Pixabay. ⓒ사진foryou. 다양한 색깔의 돌
한 가지 색이라도 미묘한 차이를 낼 수 있다. 그래서 화장품 가게를 가 보면 립스틱의 종류도 색깔도 무궁무진하다. '레드'립스틱에도 래스팅 패션, 레이디 데인저, 디보티드 투 칠리, 칠리, 브레이브 레드 셀 수 없이 많은 레드가 있다. 바닷가의 돌이라도 다 같은 모양일까. 같은 장소에서의 돌이라도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이렇게 '한 가지'에도 제각각 다른 색깔과 모양을 나타내는 걸. 우리는 애써 그 자체의 다양성을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
익히 우리나라 교육은 일률적인 교육과정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고등학교 때 'SKY'반이 만들어지고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율학습, 입시안내가 이루어졌다. 실제로 그들 중 몇 명이 'SKY'대학을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사실은 3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으며,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의 이후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교육은 바뀌었을까. 조금씩은 변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의 목적은 같다. 흔히 볼 수 있는 학원 간판이 '초등 전문 의대 입시학원'인 것처럼.
뜬금없이 교육제도를 왈가불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꿈'의 다양성,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 그 문화를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을 말하고 싶다. 직업이 다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세세한 것은 미처 몰랐다. 주위에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준비하고 갖춰야 하는지도 무지했다. 그런데 육지에 오고 보니 주위에 다양한 직업군이 실제로 있다. 그래서 조금만 정보를 알아본다면 그들에게 각 직업별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갖춰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유튜브를 통해서도 어디에서든지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모든 고급 정보와 노하우는 유튜브가 아닌 그 직업을 가진 개인만이 소장하고 있기 마련. 그들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섬은 너무 멀다.
,라는 하소연.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지하 1층에서 누군가 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온다. 문이 열린다. 어머나, 스튜어디스. 큰 캐리어, 작은 캐리어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니 퇴근하시나 보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얼핏 보니 목에 두른 스카프가 주황색이다. '제주항공'이군. 다른 날.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지하 2층에서 탄다. 문이 열린다. 어머나, 스튜어디스. 이번에는 목에 두른 스카프가하늘색이다. '대한항공'이군. 우리 동에 승무원이 2명이나 거주하고 있단 말인가. 실제 뵈니 연예인 보는 듯하다. 자고로 스튜어디스는 비행기 안에서 우아한 미소와 함께 친절함을 선보이는 분들 아닌가. 비행기 안, 공항에서만 보다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니 신기하다. 그들도사람이었지. 그렇다. 그들도 항상 스튜어디스가 아닌 집에 와서 먹고 쉬며 출퇴근하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늘어놓자면 끝도 없다. 주차장에서 키가 훤칠하고 검은색 정장을 입고서 외투를 휘날리던 분은 '기장'이다. 처음 봤을 땐 모델인 줄 알았다. 아들 친한 친구 아버님도 기장이셔서 해외를 오고 가느라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오신다고 아들을 통해 듣기도 했다. 이렇게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군이었나. 그래, 그렇다면 두 아들 중 누구를 '기장' 시켜볼까. 눈앞의 펼쳐진 꿈의 현실 앞에 마음만 앞선다.
작은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 부모님의 직업은 광고카피라이터다. 세상에나. 광고 카피라이터가 어떤 직업인지 상세히 모르는 아이들에게(이들도 이미 제주인들로서 직업은 교사, 공무원에 한정되어 있다.) 광고가 어떤 것인지, 카피라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세세하게 설명해 줬다. 결론은,
"직업이 다양하지. 그래, 꿈은 다양하게 꿀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거야."
라고 마무리지을 즈음,
"엄마는 다큐멘터리 감독도 좋아.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아니면 우리가 보는 'EBS 세계테마기행' 프로그램 PD도 좋고. 카메라 감독도 좋지."
"00 친구 아버님처럼 비행기 조종사 하면 어때. 엄마아빠 비행기 공짜로 타보자. 그 친구도 이번에 미국 갔다 왔다며."
"아니면 우리 기쁨이는 목소리도 크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니깐 댄스 가수 어때?"
라고 사심 섞인 말을 장황히 늘어놓는다. 그러나 아이들한테는 뭐가 중요할까. 자신들이 현재, 지금 제일 좋아하는 '야구선수가 꿈이야.'라고 내뱉으며 포부를 당당하게 드러낼 뿐. 바로 엄마의 입을 다물게 한다. 야구 경기도 쉽게 볼 수 있고 리틀야구단도 동네마다 있어서 '야구 선수'도 현실의 꿈이다. 그래서 한강 공원을 가도 캐치볼 하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야구 선수가 꿈이 아니더라도 놀이의 한 방법인 캐치볼. 반면 제주에서는 야구단이 한 개 정도 있다 해도 실제 볼 수 없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캐치볼을 하는 아이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흔하지 않은 놀이. 이렇게 생소하고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어느 곳에서 어떤 꿈을 꾸든 그것은 아이들의 자유다. 또한 그 꿈을 위해 인내하며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것 역시 아이들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육지에서는 '현실적인 꿈' 앞에서 꿈을 이룬 그들을 멘토 삼아 직접 만나보며 꿈을 이룰 수 있는 한 단계가 '업(UP)'되어 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