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와 건조함을 견디며
워낙 추위를 많이 탄다. 친정엄마를 닮았으리라. 항상 엄마는 집에 보일러를 켜지도 않으면서 '춥다, 추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으니까. 가을이 시작되면 내복을 껴입으시고 겨울이 되면 전기장판, 내복, 덧신까지 신으시며 온몸을 담요로 돌돌 말은 듯 무장하고 다니셨다. 그런 엄마의 체질을 닮아 수족냉증이 있다. 특히 결혼 전에는 증상이 심해 마치 온몸이 얼음동상 같았다. 발이 꽝꽝 얼어 걸을 때마다 심한 통증을 느꼈다. 얼음처럼 얼어붙은 발이 시커멓게 변할 때도 허다했다. 손도 퉁퉁 부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겨울 내내 수족냉증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외투 속 깊이 파고드는 바람만 어찌 막으면 견딜만했다. '제주'하면 '바람'이니깐. 겨울바람에 맞서 옷깃을 곧추 세우며 앞섬을 단단히 꽁꽁 여민다.
반면 육지는 다르다. 어쩜 바람 한점 없는데 추울 수 있나. 이 추위가 어디에서 오나 싶었는데 바로 기온의 차이. 바람이 없어도 추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달까. 얼음에 살이 에이는 기분이다. 피부가 쩍쩍 갈라진다. 영하의 기온이 발뿐만이 아니라 손, 귀, 코, 머리카락을 얼게 한다. 그리고 바지도. 금방 집을 나섰는데 추위에 바지가 얼어붙어 걸을 때마다 바지면에 닿는 허벅지가 아리다. 얼어버린 청바지를 입고서 어기적 어기적 발을 내딛는다. 아, 추워. 비단 이뿐이랴. 금세 눈에 눈물이 차오르며 저절로 주르륵주르륵 흐르고, 코는 루돌프 코처럼 빨개진다. 얼마나 빨개졌는지 단골 카페 주인은 벌게진 코로 등장한 필자를 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나마 불빛까지 안 나서 다행인가.
육지에 정착하여 처음 맞는 겨울은 혹독했다. 낯선 곳에 적응하느라 마음도 시린데 몸까지 으스스 떨린다. 몸과 마음에 냉기가 가득하다. 겨울왕국 그 자체. 아무런 준비 없이 겨울을 난다는 게 오산이었다. 하물며 공원의 나무도 뜨개질로 된 겨울옷을 입는데 우리는 무슨 자신감으로 버티고 있었던가. 우리의 착각이지. 결국, 온 가족이 영하의 기온에 으슬으슬 떨며 쇼핑몰로 출동했다. 털부츠, 장갑, 목도리 그리고 기모 바지까지. 덧붙여 핫팩과 내복도. 갖출 수 있는 건 모두 구비했다. 전에는 면이 아니었기에 거부했던 피부조차도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특히 기모 바지를 처음 입어보는 아이들과 기모 티셔츠를 처음 입어보는 필자도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촉감의 기모를 뜨겁게 환영했다. 아, 여태껏 왜 기모바지와 기모티셔츠를 외면했던가. 방한용품을 한가득 구매하고 나니 겨울을 이미 다 보낸 것처럼 몸과 마음이 뜨뜻해지면서 한결 홀가분해진다. 본격적인 겨울을 견딜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뭔가 독특하다. 어딜 가도 롱패딩이 여기저기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닌가. 쇼핑몰의 사람들도, 의류 매장 앞에 있는 마네킹도 서로 자신의 롱패딩을 뽐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밍크코트'도 보인다. 저 따뜻함과 한때 부유함의 상징을. 하하, 웃음이 나온다. 그렇구나. 육지의 추위는 이렇게 대비하는 거였구나. 새삼 깨달았다. 제주에서는 롱패딩, 밍크코트를 입고 나타나면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그렇게 안 추운데 무슨 롱패딩'
'밍크코트 구입해도 입을 일이 없어. 서울 갈 때나 입지.'
라고. 그렇다. 제주에서는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만 막아내면 되기 때문에 롱패딩이나 밍크코트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주는 길이와 재질에 불편함을 느낄 뿐. 그런데 육지에서는 영하의 기온을 견디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나, 보여주는 듯 기나긴 롱패딩과 가격만큼이나 따뜻함을 선사하는 밍크코트가 필수품이었던 것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며 그런 모습을 깨닫는 우리가 어설프다. 이 또한 육지에 적응하는 과정.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영하의 기온인 반면, 적응하다 못해 편했던 부분은 습도다. 적당한 습도라니. 겨울을 지내면서 갑자기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몸이 왜 간지러울까. 극한의 간지러움으로 괴로웠던 임신소양증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어떤 피부병이라도 걸렸나. 신축 아파트라 물이 깨끗하지 못한가. 새집이 문제가 있나 모든 환경을 원인으로 손꼽고 있을 때, 불현듯 생각났다. 서울 여행을 오면 호텔에서 씻고 난 후 피부가 말도 안 되게 보송보송해지고 건조해진다는 사실을. 이 지성피부인 필자가 말이다. 아, 공기가 건조해서 그렇구나. 그래서 온몸이 간지러웠구나. 로션자체를 발라본 적이 거의 없는데 수분 가득한 바디로션을 사다가 몸에 듬뿍듬뿍 발랐다. 임신 이후로 처음 바르는 듯하다. 오래간만에 바른 만큼 바로 피부에 흡수가 안되어 하얗게 로션이 묻어난다. 계속 덧바르고 덧바르고. 며칠 동안 로션을 양껏 바르자 온몸의 간지러움 증세가 사라졌다. 몸뿐이랴. 확실히 얼굴 피부도 건조하다. 스킨을 발라도 금세 얼굴 피부에 흡수되고 건조한 나머지 사막처럼 피부가 쩍쩍 갈라진다. 스킨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피부의 건조함을 살릴 '바셀린'을 구입하여 얼굴에 듬뿍 발랐다. 그제야 피부가 촉촉해진다. 피부의 건조함이 낯설다. 제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습도 최고조로 높은 여름뿐만이 아니라 겨울에도 지성피부는 건조해지지 않는다. 사면이 바다라 어디를 가도, 어느 계절을 맞이해도 습도가 높은 제주다. 그 끈적끈적한 제주의 습기라니.
단지 피부뿐만이 아니다. 제주에 살고 있는 외지인들은 이미 아는 바다. 이주해서 제일 먼저 구입하는 것이 바로 제습기이기 때문에. 제습기를 틀지 않고서는 제주의 습도를 견딜 방법이 없다. 이 습도를 간과했다가는 된통 당하기 십상이다. 곧 곰팡이 가득한 벽지와 드레스룸, 옷들을 만나게 될 테니. 또한 방바닥에 물기 가득한 발자국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육지에 살면서 필요 없던 제습기를 제주에 와서야 새로 장만하게 되는 아이러니. 한번 곰팡이를 만나고 나면 외지인들은 제습기뿐만이 아니라 옷장, 서랍, 집안 곳곳에 제습제를 숨겨둔다.
"제주는 왜 이렇게 습해요. 제습기를 조금만 가동해도 금세 물이 차요. 대체 그 물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예요? 제습기를 하루종일 가동한다니깐요."
라는 하소연은 종종 듣는 말. 여름이면 제습기를 방마다 돌리고 시간마다 제습기 물통 가득 채워진 물을 비워내는 게 당연하듯 살아왔던 필자에게는 신선한 이야기. 그렇구나, 제주가 습하구나. 제주에서 하루종일 가동되며 열심을 다했던 제습기 2대는 다용도실에 정갈하게 놓여 있다. 이사 중에 혹여나 부서질까, 제주에서 무겁게 이고 왔다. 하지만 거의 가동되지 않는다. 여름 한 철 장마 때 아이들 운동화를 건조시킬 때나 혹은 이불 건조 시 가동될 뿐이다. 하루종일 가동할 필요도 없이 4시간 정도면 족하다. 제습기 한대는 당근에 팔아넘겨도 될까, 생각하던 참이다.
설거지를 하고 건조대에 그릇을 세워두면 순식간에 물기가 마른다. 뚝뚝 떨어지는 물기 하나 없이. 육지의 건조함이 그릇에 묻은 물기까지 쭉쭉 흡수해 버렸다. 이 얼마나 적당한 습도이며 소중한 건조함인가. 이 습도가 별거 없는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준다.
두번째 맞는 육지의 '겨울'앞에. 애물단지가 된 제습기를 가지고 항상 뽀송뽀송한 피부에 만족하며 적당한 습도를 즐기고 있다. 반면 최고기온이 영하 8도인 겨울 낮에 발이 꽁꽁 얼어버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아, 이 발의 냉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계절 앞에 오늘도 견디며.
어쩜 바람 한 점 없는데 추울 수 있나
덧. 어린이집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난 엄마들이 길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추울 텐데,라고 생각할 즈음 그들을 보아하니 역시나 롱패딩을 착장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롱패딩은 하나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리가 얼어붙겠어, 남편.이라고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