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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동 무화과 Oct 30. 2022

대표한테 쓰는 부치지 못할 편지

왜냐면 말해도 못 알아들을 테니까


이미 믿음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그걸 이어붙인다는 게 말이 될까?

신뢰를 이미 잃어버린 곳에서 뭔가를 계속 해나가는 것, 그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야.




지난 밤에 너무 충격 받지 말라며 나에게 뱉었던 말들, 이미 내 마음 속에서는 백 번도 넘게 반복되었던 말이라 놀랍지도 않았어.

   

- 우리 회사에서 너에 대한 믿음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

너의 팀이 너무 무능하고, 그거에 비해 네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어

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리 회사가 얼마나 커졌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돼

지금 네가 이뤄놓은 것들도 만족스럽지 않아. 너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을 거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슬프게도.

왜 이게 나에게 충격을 줄 거라 생각한 거지? 이런 말을 나한테 처음하는 것도 아닌데?

중간에 말이 건너 오면서 얼마나 희석된 것인지, 혹은 얼마나 첨가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나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나의 자존심이 끊임없이 깎이는 식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야.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

이미 누군가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걸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아온 나로서는 그 모든 상황이 너무 쉽게 그려져.

나의 의도나 내가 파악한 정황은 들어보지 않은 채로 내 앞에선 하지 못할 말들이 오고 갔겠지.

나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작은 노력조차 묵살되었고. 어쨌건 내가 팀의 모든 성과에는 악영향을 끼쳤다는 대전제 하에 말이야. 너도 어차피 별로 들을 생각도 없더라.


여튼 중요한 건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있던 건 '나'인데도, 정작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넌 그 말들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이미 이곳에서는 신뢰를 잃었다는 방증이야.

내가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해도 모든 건 내 잘못이겠지, 아무렴.




그런데도 그동안 내가 뭐를 위해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계속 있었냐고?

너네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나를 믿고 따라줬던 팀원들이 ‘무능하다’라는 식의 평가를 받는 것도 못마땅했고,

이 회사가 이 만큼 크는 데에 잘된 건 다 네가 잘나서고, 안된 건 다 내가 못나서다 라는 식으로 돌리는 것도 빡쳤거든.


그래서 버티고 있었는데,

이젠 못해먹겠다.

진짜 못해먹겠어.


나 멘탈 세다고 자꾸 말하던데, 아니야.

나 그냥 맨날 울면서 회사 다니고 있어.

내가 뭘하든 절대 이곳에서 나는 잘했다는 말은 못 들을 것 같아.

내가 어떤 걸 하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얘기를 듣겠지.


넌 진짜 내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해?

‘나’라는 존재가 의미하는 게, 진짜 '나'가 아니라 나를 선택했던 ‘너’이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거 아니니?

나의 실패가 곧 너의 실패를 의미해서 나를 못 놓고 있는 건 아니야?

넌 나를 믿기나 해?




비슷한 기간 동안 성과로만 봤을 때에는 비슷한 정도를 이끌어 내도,

왜 누구는 잘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왜 누구는 아무런 발전이 없다는 평을 받아야 될까?

왜 그렇게 자기 어필이 중요한 걸까?

왜 말보다 행동을 보지는 못하는 걸까?

   

- 그렇게 뽐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어

자기 어필하는 것도 능력이야


그게 진심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그런 곳엔 있고 싶지 않아.

이면을 읽지 못하고, 결과로 보지 않고, 번지르르한 말이 중요하고, 그런 게 진짜 먹히는 곳.


어느 정도 세상 살아가면서 필요하다는 걸 알겠는데, 여기서는 아니야.

해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 꼴보기가 너무 싫어.

그런 게 먹히고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고. 겨우 이 정도에도 사리분별 못하는 애였어?


계속해서 내가 나를 증명해야 되는 것도 화가 나.

내가 지금껏 보여준 건 뭔데? 앞으로 뭘 더 보여주길 원하는데? 내가 뭔가를 보여주면 달라질 생각이 있긴 해?

내가 어떤 걸 보여주든 그걸 볼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어떻게 뭘 증명해?

여기서는 한번 약점 잡힌 사람을 끝없이 까내려야지 소속감 느끼고 인정 받는 곳 아니야?

난 이미 약점 잡힌 사람 아니니?




어디까지 더 변명할 수 있을까?

프레임을 바꿔서 네 충실한 오른팔이 한 말을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너는 똑같이 반응했을까?


한창 갈등이 시작되었을 때, ‘어쨌든 너는 목표 수치를 달성하지 못했었잖아’라는 말을 너가 하더라.

그래서 어쨌건 수치로 증명하려고 했어. 성과로 증명한다는 게 바로 그런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내가 더 잘하려고 아등바등할수록, 계속해서 시야가 편협해지고 있던 걸까?

어떻게든 달성하려고 했던 그 목표가 결국 내가 거시적으로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옹졸했다는 걸 계속해서 보여주는 증거였구나.


수없이 말을 바꾸고, 네 의도를 더해서 듣는 태도에는 진절머리 나.

우리 팀이 구체적으로 나아갈 미래가 어딘지, 목표하는 시장이 무엇인지 방향이란 게 있었나?

결국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아서 팀 전체가 방황하고 있었는데, 결국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게 맞는 건가?

너도 못 찾은 회사 비전에 대해, 정작 왜 너는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는 거야?

내가 말할 땐 틀린 내용이 되다가, 어느 날 네 입으로 말하면 맞는 말이 될 때도 어이가 없더라.

아, 그렇게 재생되는 생각들이 다 너의 것이어서, 이 모든 회사의 성장에서 너의 기여도만이 엄청난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럼에도 혹시나, 만에 하나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어.

그래, 내가 다 잘했다는 건 아닐 테니까,

결과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혹시나 성과를 내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그리고 지켜 본 결과는…? 두구두구


나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나 혼자 백번 스스로를 다잡으며 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

너가 좋아하는 ‘형세’라는 거 있지?

난 이미 그 모든 형세가 안 좋은 곳에서 뭔가를 억지로 하고 있는 거 같아.

더 이상은 내 자존감이며, 자신감이며, 삶의 활기를 모조리 잃은 채로 살고 싶지 않아.


너의 충실한 똘마니가 되었다면, 우리 지금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비위 좀 맞춰주면 되는 거니까.

근데 알지? 진짜 끔찍하게 하기 싫더라.

우리 일하려고 만난 거잖아^^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고 난 조용히 사라져볼게ㅋㅋㅋㅋ

그간 즐거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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