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말해도 못 알아들을 테니까
이미 믿음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그걸 이어붙인다는 게 말이 될까?
신뢰를 이미 잃어버린 곳에서 뭔가를 계속 해나가는 것, 그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야.
지난 밤에 너무 충격 받지 말라며 나에게 뱉었던 말들, 이미 내 마음 속에서는 백 번도 넘게 반복되었던 말이라 놀랍지도 않았어.
- 우리 회사에서 너에 대한 믿음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
- 너의 팀이 너무 무능하고, 그거에 비해 네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어
- 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리 회사가 얼마나 커졌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돼
- 지금 네가 이뤄놓은 것들도 만족스럽지 않아. 너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을 거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슬프게도.
왜 이게 나에게 충격을 줄 거라 생각한 거지? 이런 말을 나한테 처음하는 것도 아닌데?
중간에 말이 건너 오면서 얼마나 희석된 것인지, 혹은 얼마나 첨가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나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나의 자존심이 끊임없이 깎이는 식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야.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
이미 누군가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걸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아온 나로서는 그 모든 상황이 너무 쉽게 그려져.
나의 의도나 내가 파악한 정황은 들어보지 않은 채로 내 앞에선 하지 못할 말들이 오고 갔겠지.
나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작은 노력조차 묵살되었고. 어쨌건 내가 팀의 모든 성과에는 악영향을 끼쳤다는 대전제 하에 말이야. 너도 어차피 별로 들을 생각도 없더라.
여튼 중요한 건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있던 건 '나'인데도, 정작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넌 그 말들에 더 귀를 기울였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이미 이곳에서는 신뢰를 잃었다는 방증이야.
내가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해도 모든 건 내 잘못이겠지, 아무렴.
그런데도 그동안 내가 뭐를 위해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계속 있었냐고?
너네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나를 믿고 따라줬던 팀원들이 ‘무능하다’라는 식의 평가를 받는 것도 못마땅했고,
이 회사가 이 만큼 크는 데에 잘된 건 다 네가 잘나서고, 안된 건 다 내가 못나서다 라는 식으로 돌리는 것도 빡쳤거든.
그래서 버티고 있었는데,
이젠 못해먹겠다.
진짜 못해먹겠어.
나 멘탈 세다고 자꾸 말하던데, 아니야.
나 그냥 맨날 울면서 회사 다니고 있어.
내가 뭘하든 절대 이곳에서 나는 잘했다는 말은 못 들을 것 같아.
내가 어떤 걸 하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얘기를 듣겠지.
넌 진짜 내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해?
‘나’라는 존재가 의미하는 게, 진짜 '나'가 아니라 나를 선택했던 ‘너’이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거 아니니?
나의 실패가 곧 너의 실패를 의미해서 나를 못 놓고 있는 건 아니야?
넌 나를 믿기나 해?
비슷한 기간 동안 성과로만 봤을 때에는 비슷한 정도를 이끌어 내도,
왜 누구는 잘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왜 누구는 아무런 발전이 없다는 평을 받아야 될까?
왜 그렇게 자기 어필이 중요한 걸까?
왜 말보다 행동을 보지는 못하는 걸까?
- 그렇게 뽐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어
- 자기 어필하는 것도 능력이야
그게 진심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그런 곳엔 있고 싶지 않아.
이면을 읽지 못하고, 결과로 보지 않고, 번지르르한 말이 중요하고, 그런 게 진짜 먹히는 곳.
어느 정도 세상 살아가면서 필요하다는 걸 알겠는데, 여기서는 아니야.
해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 꼴보기가 너무 싫어.
그런 게 먹히고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고. 겨우 이 정도에도 사리분별 못하는 애였어?
계속해서 내가 나를 증명해야 되는 것도 화가 나.
내가 지금껏 보여준 건 뭔데? 앞으로 뭘 더 보여주길 원하는데? 내가 뭔가를 보여주면 달라질 생각이 있긴 해?
내가 어떤 걸 보여주든 그걸 볼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어떻게 뭘 증명해?
여기서는 한번 약점 잡힌 사람을 끝없이 까내려야지 소속감 느끼고 인정 받는 곳 아니야?
난 이미 약점 잡힌 사람 아니니?
어디까지 더 변명할 수 있을까?
프레임을 바꿔서 네 충실한 오른팔이 한 말을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너는 똑같이 반응했을까?
한창 갈등이 시작되었을 때, ‘어쨌든 너는 목표 수치를 달성하지 못했었잖아’라는 말을 너가 하더라.
그래서 어쨌건 수치로 증명하려고 했어. 성과로 증명한다는 게 바로 그런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내가 더 잘하려고 아등바등할수록, 계속해서 시야가 편협해지고 있던 걸까?
어떻게든 달성하려고 했던 그 목표가 결국 내가 거시적으로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옹졸했다는 걸 계속해서 보여주는 증거였구나.
수없이 말을 바꾸고, 네 의도를 더해서 듣는 태도에는 진절머리 나.
우리 팀이 구체적으로 나아갈 미래가 어딘지, 목표하는 시장이 무엇인지 방향이란 게 있었나?
결국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아서 팀 전체가 방황하고 있었는데, 결국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게 맞는 건가?
너도 못 찾은 회사 비전에 대해, 정작 왜 너는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는 거야?
내가 말할 땐 틀린 내용이 되다가, 어느 날 네 입으로 말하면 맞는 말이 될 때도 어이가 없더라.
아, 그렇게 재생되는 생각들이 다 너의 것이어서, 이 모든 회사의 성장에서 너의 기여도만이 엄청난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럼에도 혹시나, 만에 하나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어.
그래, 내가 다 잘했다는 건 아닐 테니까,
결과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혹시나 성과를 내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그리고 지켜 본 결과는…? 두구두구
나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나 혼자 백번 스스로를 다잡으며 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
너가 좋아하는 ‘형세’라는 거 있지?
난 이미 그 모든 형세가 안 좋은 곳에서 뭔가를 억지로 하고 있는 거 같아.
더 이상은 내 자존감이며, 자신감이며, 삶의 활기를 모조리 잃은 채로 살고 싶지 않아.
너의 충실한 똘마니가 되었다면, 우리 지금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비위 좀 맞춰주면 되는 거니까.
근데 알지? 진짜 끔찍하게 하기 싫더라.
우리 일하려고 만난 거잖아^^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고 난 조용히 사라져볼게ㅋㅋㅋㅋ
그간 즐거웠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