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럭키걸 Oct 23. 2024

남한테 징징대다가 현타 왔어

벼락치기할 수 있는 시험문제인 줄 알았지

꼬인 내 마음의 문제를 시험문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문제엔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그 원인을 찾아 수술하듯이 잘라 없애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이를 위해 의사를 찾아가 약을 지어먹기도 했으며,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했고, 여러 신부님을 붙잡고 울고 불며 답을 달라고 징징댔었다. 그럼 그분들이 한방에 답을 주실 줄 알았고 그 답을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렇다. 내 마음의 문제조차도 벼락치기 시험 공부하듯이 한 방에 해결되는 방법을 원했다.


나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 덕분에 하루하루 연명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던 상황이 나아져도 나는 여전히 불행을 떠올렸다. 불행이 습관이 된 것이었다. 우울증을 인위적으로 잘라 없애려던 내 모든 노력에 현타가 왔다.


yansimalardan_pexels

'이런 된장'


누군가에게 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말을 잔뜩 하고 나면 나쁜 기억이 크게 보였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깨달았다. 꼬인 생각을 풀기 위해 내가 나를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처음엔 어떻게 나를 설득해야 할지 몰랐고 나를 마주하기가 귀찮고 두려웠다. 회피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버는 삶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꾸 내 행복에 자격과 조건을 걸었다. 


그 결과 건강을 잃었고, 반강제로 일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허무한 마음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가 되려는 마음도 없었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도 자세히는 몰랐지만 마음속에선 계속 무언가를 내뱉고 싶어 했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많이 썼다.


개인적으로 화가 나는 일을 겪으면 분노가 가득한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글을 쓴 날에는 하루 종일 분노를 유지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이 들었다. 그날 썼던 글이 머릿속에 박혀 계속 떠나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과거에 쓴 글을 들춰 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 좋은 글을 쓰면 좋은 생각이 나를 좋은 곳으로 이끌었지만,

기분 나쁜 글을 쓰면 그 나쁜 생각이 나를 괴롭혔구나'


어떻게 보면 이게 참 뻔한 말이지만 이머리가 아니라 실행을 통해 경험으로 깨달으니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후엔 분노가 가득 찬 글은 쓰더라도 내가 좀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글쓰기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그 어떤 인위적인 목표나 노력 없이 푹 빠져서 했던 유일한 놀이였다.




남에게 내 고통을 전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내 고통을 충분히 아내고 이를 애도하는 과정이 나를 살렸다는 걸 깨달은 날도 있었다. 애도가 끝나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상상하며 글을 다시 썼다. 부자가 되면 행복할 거야라는 조건부적 행복 말고 지금 당장 행복을 느끼고, 지금 당장 작은 것을 크게 보며 감사를 느끼는 사람을 상상했다. 조금씩 내 부정적인 생각의 길에 균열을 냈다. 옛날처럼 나쁜 생각을 인위적으로 도려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며 1년 동안 내 마음의 소리를 추적하고 글을 쓰며 새로운 생각의 길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문제는 차 신부님 책 '잊혀진 질문'에 나온 어떤 시를 읽으며 문제를 하늘에 던져버리는 연습을 자주 한다. 대신 마음에 희망과 기대를 담아 하늘에 던진다.


'언젠가 나도 답 속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Big Q1. 한 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하지만 좋은 뜻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 지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더 커집니다.

최선의 선택은 고통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너에게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그 답과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설령 고통의 의미가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난다 해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 그것은 우리의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자가 준비되어 있을 때 스승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선불교의 말이 있듯이

때가 되어야 알아듣는 법입니다.


_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차동엽 지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