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노인의 부성
몇 해 전, 영화 "네브래스카"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 있었다.
영화 "네브래스카"는 치매 환자인 우디의 이야기이다.
백만 달러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믿는 그는 돈을 받기 위해
사무실이 있는 네브래스카의 링컨까지
4개의 주를 지나는 먼 길을 걸어서 가려고 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동행하기로 하고
둘은 그렇게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다.
복권이 아닌
홍보 광고였을 뿐이지만
아버지는 당첨금을 아들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연로한 몸을 이끌고
그 길을 떠난 것이었음이
영화의 말미에 밝혀진다.
내 손님도 영화 속 우디처럼
치매에 걸리신 상황이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짐을 꾸리시더니
부인에게
예전에 친구에게 빌려주었던 돈을 받으러
한국으로 나간다며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이에 놀란 부인께선 며느리에게 연락을 하시고
며느님께서는 나에게 SOS를 치셨다.
나는 바로 그분 댁을 방문했다.
며느님이 오셔서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셨다.
"아버님, 지금 코로나라서 한국 못 가요. 나중에 이거 다 끝나면 가요." 하고
며느님이 아버님 손을 잡고 마음을 돌리려고 간곡히 말씀 중이셨다.
내가 가만히 와서 인사하고 앉으니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왜정 끝나고 장사를 해서 돈을 엄청 벌었다고.
이만한 가방에 돈을 가득 채워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어.
그때 친구 하나가 돈을 융통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해줬지.
이제는 내가 그걸 받아야 될 것 같아.
요새 경기도 안 좋은데 이 녀석들 좀 보태줘야 될 거 아니야."
불현듯
오래전 빌려준 돈을 못 받은 것을 생각해 내고
아들들에게 돈을 보태주기 위해
서울로 나가야겠다는 이분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치매로 와병 중에도
무의식의 끝에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고 싶다는 부성애가 남아
저 짐을 꾸리셨겠다 싶어서.
그분은 둘러앉은 모두에게
몇십 년 전의 사업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말씀해주셨다.
같이 이야기를 듣다가
점심때가 되어 부인께서 식사 준비를 하실 무렵
그분은 진정이 되셨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냐는 듯
서울행은 유야무야 잊혔다.
이렇듯
질병으로
많은 기억들이 기화되듯 사라진 후에도
결정체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사랑,
미움,
또는 집착과 같은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