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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kyjodi Mar 31. 2024

밥이 뭐길래

대학 1학년, 가을 학기 수강 신청을 할 때의 일이다. 동기 한 명이 오후 네시부터 여섯 시로 배정된 교양 수업을 못 듣는다고 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저녁밥. 자신이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면 일곱 시인데 그러면 아버지 저녁 식사를 제 때 못 차려 드린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장사를 하셔서 저녁은 늘 자신이 담당을 해왔던 장녀의 슬픈 현실이었다. 나는 속으로 기가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꿀 수 없을 듯한 현실에 괜한 고통을 더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 놓친 교양 수업이 일생일대의 배움의 기회가 되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일인 것처럼 안타까웠다.


십수 년이 지났다. 내가 일하는 로스앤젤레스의 시니어 하우징에서도 여전히 밥이 굴레가 되는 것을 본다. 주민들 상담을 하면서, 여성들이 배우자의 식사 때문에 하고 싶은 활동을 못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가 파마 한 번을 하려고 해도 얼마나 힘든 지 몰라요. 우리 집 양반이 점심을 꼭 한시에는 드셔야 되거든. 그래서 내가 미용사한테 첫 손님으로 가게 해달라고 꼭 부탁을 해요. 사실 머리 한 날은 친구와 만나서, 밖에서 점심도 먹고 차도 한 잔 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난 못해요. 우리 집 양반 점심 해드려야 돼서.”


주민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적 배경, 국적을 불문하고 대개 식사준비는 여성들이 도맡아 한다. 그중 미국인들의 경우, 여성에게 주어지는 편리함과 자유의 폭이 넓은 편이다. 일단 메뉴 자체가 간편하다. 그로서리 마켓에서 사 온 샐러드나 샌드위치로도 충분히 점심 한 끼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1920년대부터 여성의 권리가 법적으로 동등하게 보장되었던 사회적 배경 까닭인지 남성들은 부엌일에 관해 꼭 ‘여성의 일’이라고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한국인의 식사는 밥과 국, 여러가지 반찬이 곁들여 지는 '반상'의 형태이다. 샌드위치처럼 미리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을 수 있는 일품요리가 거의 없다. 차갑게 먹을 수 있는 콩국수나 냉면의 경우라도 면을 삶아서 식히는 공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썩 간단하지는 않다. 전자레인지에 간편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피자와 비교하면 조리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노년층의 경우 반상이 제대로 된 식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대체 메뉴로 절충하기도 어렵다.  70,80대 한국 남성들은 대체로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 일 난다’라는 통념을 가지고 계셔서, 개인차는 있겠지만 많은 분들이 부엌일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두터워 보인다. 하여 노년의 한국 여성들은 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 듯하다.

 

노인 사회학 연구에서 살펴보면,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난 일을 통해 얻는 만족감이 남녀 모두 상당히 높다는 보고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자동차 수리나 미장일 등을, 남성이 요리나 옷수선 등을 익혔을 때의 만족도가 통상적으로 성 역할에 맞는 일을 할 때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여성들의 영역이라고 믿어졌던 요리를 남성들이 익혀서 “오, 식당 차리셔도 되겠어요” 하는 반응이 나올 때의 그 뿌듯함은 전구를 갈았을 때보다 무척 크다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는 것은 노년 생활의 활력과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금은 유튜브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집에서 손쉽게 배울 수 있는 시대이다. 남성들이 간단한 요리법을 익혀서 식사를 준비해 본다면 어떨까. 요즘은 밀키트도 많이 보급되어 조리만 할 수 있다면 한 끼 해결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본인 스스로도 만족하시고 부인도 자유 시간을 얻으실 수 있다면 전체 행복도가 상승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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