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와 함께 하는 나의 삶
시니어 하우징에서 주민 서비스 코디네이터로 일한 지도 15년이 되어 간다. 필드 내의 여타 기관들에서 일한 경력까지 합치면 거의 20년을 시니어들과 함께 보낸 셈이다.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노년학( gerontology) 프로그램 디렉터였던 Dr. S 와의 인연으로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고, 미국 취업 비자와 영주권을 스폰서 해주신 S 노인 센터의 원장님의 덕으로 나는 이 곳 로스앤젤레스에서 시니어들과 함께 일하며 뿌리내리고 살게 되었다.
그간 일하면서, 시니어 서비스 기관 들을 지원하는 매크로(macro) 단체와 시니어에게 직접 서비스 (direct service) 를 제공하는 기관에서 일을 해보았는데 내겐 후자가 더 잘 맞았다. 매크로 기관에서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다. 리포트와 통계 자료를 내고, 협력 기관들과의 무수한 미팅과 행사 준비, 프리젠테이션으로 미국 전역의 시니어 커뮤니티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서비스 제공에 있어서도 이용률 등을 수치로 내서, 지역별 비교 후 토론을 통해 자료 분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흥미롭다. 지역색과 인구 분포도 등에 대한 공부와 그에 따른 인과관계도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허나, 시니어들과 대면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어느 순간부터 내게 회의감을 주었다. 숫자와 리포트, 토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이후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팅으로 옮기고 나니 좌충우돌의 연속이긴 했지만, 훨씬 박진감 넘치고 손님들과 개인적으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간 필드에서 시니어들과 교류를 함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변모해왔을까. 처음 필드에 들어왔던 파릇파릇한 신참이었던 나는 '수퍼맨'처럼, 그분들의 고통을 모두 해결해드리겠다는 과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분들의 괴로움을 단박에 해결해드리지 못하는 내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의기소침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감정을 여과 없이 백퍼센트 받아들여, 내 감정 상태도 그에 따라 요동을 쳤다.
커리어 초반에 뵈었던 Mrs. Y. 아들에게 생활비 보조를 받는 본인의 처지를 비관하며 우울증에 빠져서, 매일이 슬픈 분이셨다. 그분은 시민권 시험에 합격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생활 보조금 (Supplemental Security Income) 을 받으면서 아들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을 여생의 목표로 삼고 계셨다. 돕고 싶은 마음에 나는 그 분이 시민권을 받으실 때까지 수년간 함께 울며, 그 눈물의 여정에 함께 했다.
나는 시민권 공부를 위해 문제집을 구해드리는 것은 물론, 짬짬이 문제 리뷰를 도왔다. Mrs Y가 공부가 마음대로 안된다고 눈물 지으실 때 같이 슬퍼했다. 첫 인터뷰 불합격후, 심사관을 원망하며 부정적인 에너지로 온몸과 마음을 불태우시는 그녀 이상으로 나는 분노했다. 또한 '엄마로서 짐이 되는 부끄러운 삶'을 산다며 Mrs Y의 우울에 쉽게 동화되어 내 마음도 난파선처럼 함께 가라앉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모든 것이 삶의 지혜가 부족해서였음을. 나는 그분들의 고통과 불편을 일정 부분 경감 시켜주는 '조력자'에 지나지 않음을 이제사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항상성'을 유지해야만 다른 손님들 역시 성실함으로 모실 수 있고, 나 자신도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최선을 다하되, 내 몫이 아닌 부분에 관해서까지 걱정하지 않고 늘 희망을 잃지 않는 쪽으로 변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일을 하다 보니, 때로는 내가 염려하던 상황들이 예상치 못한 게임체인저의 등장으로 해결이 되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공공 정책이 바뀌면서 손님들의 문제를 자연히 해결해 드릴 수 있기도 했고, 혹은 틀어졌던 손님/자녀와의 관계가 어떤 계기를 통해 좋아지면서 상황이 해결이 된 경우도 있었다.
앞으로 글을 통해서 그간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