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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라이프 May 26. 2020

외할머니의 삶을 담은  소울푸드, 식혜

할머니의 부재보다 식혜의 부재가 더 슬펐던...

    미국에서 우리의 밥상은 한국에서보다 더욱 한국을 담고 있다. 얼마나 우리의 입맛은 간사한지.

한국에 있을 땐 가끔 먹는 미국 초콜릿이나 햄버거에 열광하던 아이들도 미국에 오고 나니 미국 먹거리보다는 무조건 한국 과자와 한국 먹거리에 열광했다. Snickers보다는 자유시간을, Lays보다는 새우깡과 콘칩을 먹고 싶어 했다. 몇 년 전 허니버터 칩이 유행했을 때는 학교탐방 갔었던  UC San Diego의 학생식당 게시판에 대문짝 만하게 한글로 쓰여 있던 "허니버터 칩 좀 사다 줘."라는 글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딸아이의 연습장에 빼곡하게 쓰여 있던 먹고 싶은 우리 음식 리스트에 적힌 간장게장을 보는 순간 선명한 주황색 암케의 알이 내 눈앞에 어른거릴 정도였다.

    한국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일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힐링해주는 가장 쉽고 행복한 방법이다.

한식, 우리 음식은 그냥 끼니이고 간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의 그리움이고 추억이고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내 몸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배추가 구하기 힘들 때는 양배추로라도 김치를 담가 먹어야 하고, 고추 대신에 할라피뇨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깻잎이나 부추처럼 미국에서 구하기 힘든 우리만의 야채를 손수 마당에 키우시는 분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가끔 한 움큼씩 부추나 깻잎을 주실 때마다 깻잎 한 잎 한 잎이 얼마나 반갑고 예쁜지 고귀하고도 감사하다.

하물며 미국 마켓에 없는 야채 하나 얻어도 이런 느낌인데, 한국음식은 오죽하겠는가.

불고기, 갈비, 육개장  등등 많은 음식들은 요즘 K-food의 붐을 타고 파는 식당도 많고 그래도 집에서 비슷한 손 맛을 내 보게 되지만, 감히 흉내내기 힘든 음식이 있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요리의 내공이 필요한 음식,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는 음식, 잘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그런 음식, 시간과 정성이 레시피의 핵심인 음식, 식혜가 바로 그것이다.

시판되고 있는 **식혜, @@식혜 등을 구하러 한참을 달려 한국 마켓에 가서 사 와도

내가 옛날 먹던 그 맛을 생각하면 용납이 안 되는 맛이다. 식혜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설탕이나 과당으로 적절히 얼버무리려는 장삿속의 불쾌한 뒷맛을 지녔다.

식혜 맛이 그리워 몇 번 시도를 하느라 엿기름가루를 어렵게 구해 와서 식혜를 만들어 보았다. 보온 버튼 대신에 취사 버튼을 잘못 눌러 밥솥을 망가뜨린 이후로는 나는 식혜 만들기를 접었다.




    내게는 유일한 조부모이셨던 외할머니는 유독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셨던 분이셨다. 물론 엄마가 오빠를 힘들게 낳았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할머니의 오빠에 대한 편애가 좀 지나치셨다. 차별 없는 사랑으로 아니 어쩜 막내라서 나를 더 이뻐하셨던 부모님과 달리 늘 오빠만을 지금의 아이돌을 바라보는 사생팬의 그 그윽함을 가득 머금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같이 밥을 먹다가도 오빠가 물먹고 싶다말이라도 하게 되면 옆에서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나더러 물을 가져오라고 하셨고 나는 부당한 대우에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나만 미워하시는 것 같은 외할머니시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곱게 화장하시고 긴 머리를 풀러 예쁘게 쪽을 찌시는 그 모습을 외계인 보듯 이상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단아함에 마음속으로 많이 감탄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푸근한 엄마랑 달리 깐깐하시고 고우시고 매사 철저하셨던 외할머니.

그 외할머니에 대한 미움과 섭섭함을 고스란히 날려버릴 수 있는 음식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밥알 동동 외할머니표 식혜였다.

미각이 발달한 내 입맛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식혜는 눈으로 보기에도 깔끔하고 그 특별한 단맛은 백설탕이 만든 단맛이 아닌, 갈증을 유발하는 단맛이 아닌 그런 그윽하면서도 깊고도 개운한 단맛, 식혜 고유의 깊은 단맛을 지녔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식혜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단연 정평이 나 있었다. 설날 다른 집에 세배 갔다가 먹어 본 식혜와는 완전히 차별화된다. 어느 집 식혜는 구수한 달콤함은 지녔지만 맑고 투명한 액체가 아닌 약간 회색 기미가 돌아서 지저분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어느 집 식혜는 내가 좋아하는 밥알이 다 가라앉아 숟가락으로 퍼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의 식혜는 깔끔한 비주얼을 지녔다.  뿌옇지 않은 맑은 식혜는 하얀 연꽃에 뒤덮인 연못처럼 식혜의 윗면을 하얀 밥알이 가득 덮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잣도 빠지지 않고 동동 떠 있어서 식혜를 마실 때 입안에 휩쓸려 들어온  잣 알들을 깨물 때 느껴지는 고소한 잣의 풍미가 식혜의 고급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보리쌀이 싹터서 엿기름(맥아)이 만들어 지는 과정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그냥 엿기름을 사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리를 직접 싹을 틔워서 당신이 직접 만드신 엿기름가루를 풍족히 사용하셔서 만들기 때문에 설탕 맛이 아닌 엿기름 본연의 감칠맛을 갖게 된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할머니 에서 직접 만드신 조청에 인절미를 찍어 먹었, 꿀보다 더 맛있던 조청도 바로 그 엿기름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할머니께서는 식혜를 만드실 때, 살얼음이 살짝 얼어있을 정도의 시원한 식혜 국물과 별도로 하얀 밥알을 씻어 헹구어 다른 깨끗한 물에 담가 놓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설탕으로 비중이 높아져 밥알이 가라앉지 않도록 깨끗이 씻어 꼭 짜 놓으셔서 삭은 밥알이 동동 떠 있을 수 있도록 아주 비중이 낮게 만들어 놓으시는 당신의 기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원한 식혜에 삭힌 밥알을 한 수저 떠 넣으면 금방 요술같이 눈처럼 하얀 밥알들이 식혜 그릇의 표면을 하얗게 뒤덮었었다.

    모든 과정이 전통의 방식대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슬로 푸드.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매 단계 단계마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사랑의 손길로 엿기름가루를 가라앉히고 앙금 없는 깨끗한 윗물만 미동 없이 조심스레 따라내어 삭히시고 끓이시고 거르시고 하는 전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는 건강식, 식혜.

  그 식혜가 만들어 지기까지의 전 과정은 외할머니의 굴곡진 인생을 닮았다.  일찍이 전쟁으로 미망인이 되셔서 어르신을 모시고 5남매를 양육하시며 많은 일들을 겪으시며 사셨을 할머니.  외할아버지 살아생전에는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다가 미망인이 되시자 변하는 동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가라앉히시느라, 외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시느라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불면의 밤을 보내시며 사셨을까. 얼마나 긴 세월을 당신 혼자 5남매를 키우시느라 속을 끓이시고 한없는 기다림을 간직하신 채 아픔은 흘려보내시고 좋은 기억만을 걸러내시며 살아오셨을까.  당신 자녀들의 삶이 하얗게 피어오르길,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를 늘 꿈꾸시며 살아오셨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살아계실 것 같은 할머니가 깔끔하신 당신 성격처럼 큰 병 없이 얼마간 앓으시다 노환으로 떠나셨다. 다들 호상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가끔 나에 대한 미움을 표현하시긴 하셨지만 할머니의 부재가 슬펐다. 아니 솔직히 말해 할머니의 부재보다는 그 맛있는, 내게 너무나 특별한 식혜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그런 식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내게 있어 식혜의 장례식과도 같이 느껴졌다. 

    지금은 내게 식혜의 동의어로 추억되고 있는 나의 외할머니. 비록 편애하셨지만 그분의 오랜 손길과 정성으로 빚어진 그 식혜가 바로 말씀으로는 잘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의 맛과  비교는 안 되는 맛이지만 식혜라도 먹게 되는 날에는 아이들에게 늘 외할머니의  단아하고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 식혜 맛을 얘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량생산으로 넘치고 흔해진 것들 사이에 묻혀 사라져 가고 잊혀가는 우리의 진짜를  간직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과 안타까움일 수도 있겠지만, 밥알 동동 하얗게 피어 나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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