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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가 Sep 17. 2015

#18 1주일간의 고정멤버

드디어 고용불안을 해소하다

포아티나 마을에서 본 주변 풍경

포아티나로 이동하다


워홀의 의미가 무엇일까? 포아티나로 가기로 결정한 후 나는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끊임없이 나에게 되물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서있는 곳이 길이며, 목표인 것 같았다.


재익이형은 일단 포아티나에 가서 돈을 벌면서 닭공장을 기다리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데본포트에서는 일주일에 많이 일해도 2일 밖에 일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타즈매니아로 온지 별로 안된 상준이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브로콜리 농장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생활비는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아티나로 가는 날. 재익이형은 일을 마치고 우리를 포아티나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우리는 어차피 다시 데본포트로 올 거이라 생각했기에 짐을 다 꾸리진 않았다. 필요한 것들 위주로 짐을 싸고 재익이형을 기다렸다.

오후 6시에 포아티나로 출발했다. 호주에서 차로 이동할 때에는 내비게이션이 필수다. 호주 자체 내비게이션도 있지만 스마트폰에 기본으로 탑재된 지도 애플리케이션 만으로도 충분하다.


창문 밖은 금세 어두워지고 자동차 불빛에 의지해 달렸다. 호주는 땅이 크기 때문에 타운 근처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가로등이 없다. 그래서 무섭기도 하다. 포아티나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와 상준이는 불안과 걱정이 앞섰고, 재익이형도 아마 미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모든 워홀을 재익이형한테 맡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포아티나까지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포아티나라는 마을에 숙소가 있었다. 첫 날은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곳을 연결해준 에이전시에서는 이 숙소에서 머물다가 며칠 후에 사람들이 지내는 숙소로 옮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재익이형은 우리 짐을 내려주고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다시 데본포트로 갔다. 어두운 밤, 멀어지는 자동차 브레이크 등이 아련하게 보였다. 나와 상준이는 임시숙소에 짐을 다 풀치 않은 채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방안에는 2층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이었고, 우리 둘 이외의 대만 워홀러 한 명이 더와서 3명이서 쓰게 되었다. 내 자리는 창문 쪽 2층 침대의 2층이었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아늑했다. 작은 방안에는 작은 세면대가 있고, 붙박이장이 있어서 좁았지만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바로 일에 투입된다는 말에 우리는 토스트로 도시락을 싸놓고 일찍 잠을 청했다.


임시숙소에서 젖은 작업복을 말려놓은 모습

또 다시 브평선을 보다


차가 없는 나와 상준이는 대만 워커의 차를 타고 일터까지 갈 수 있었다. 태워주는 대가로 ‘픽업비’라 불리는 요금은 하루에 5불씩이었다. 차가 없는 워홀러들은 농장, 공장 등 일하러 갈 때 차를 얻어 타고 가야 한다. 거리에 따라 요금에 다르다. 한국인들끼리는 꽁자로 태워주는 경우도 있지만 생각보다 드물고, 정당하게 픽업비를 내고 타는 것이 픽업해주는 사람과 픽업받는 입장에서 깔끔하다.


대만 워홀러의 이름은 ‘Gayo’였다. 한국말 발음으로는 ‘가요’인데 가요에게 한국 노래를 한국말로 하면 가요라고 말하니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선수 치듯 말했다. 가요는 워홀 온지 1년이 넘었고, 돈 버는 것이 주 목적이라고 했다. 타즈매니아에서는 일을 구하기 힘들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일터로 가는 차 안의 공기는 차갑다. 실제로 새벽이 춥기도 하거니와 모두들 일터로 가는 것에 딱히 감흥이 없기 때문이다.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브로콜리 농장에는 이미 기존 워커들과 슈바들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일했던 곳 보다 훨씬 큰 규모의 브로콜리 농장이었다. 내가 일했던 농장은 트랙터 1대에 8~10명이 작업했는데 이곳은 트랙터가 3대씩 움직였다. 20~30명 정도 되는 워커들이 이미 작업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트랙터를 운전하는 분들도 슈바였고, 워커들과 같이 브로콜리를 따는 슈바도 있었다. 브로콜리를 따는 슈바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오지여자였다. 새로운 워커들인 우리에게 작업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나와 가요는 경험이 있었고, 상준이는 경험이 없었기에 주의 깊게 들었다. 하지만 작업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말로 아무리 멋들어지게 설명한단들 실제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아 본 적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반 워커들은 한 사람이 브로콜리 2줄을 맡아 따지만, 슈바는 초보자인 우리에게 2명이서 3줄을 맡겼다. 트랙터들이 자리를 잡고, 트랙터 앞 쪽에 선 워커들은 이미 브로콜리를 따기 시작했다. 우리는 3개의 트랙터 중 첫 번째 트랙터 왼쪽 뒤에 자리를 잡았다. 트랙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겪었던 브로콜리 농장과 트랙터의 속도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브로콜리 크기가 컸고, 양이 많았다. 대부분 어른 손바닥을 넘는 크기였고, 속이 단단해 1kg 넘는 브로콜리들이 많았다.


처음이 아닌 나는 느리지만 요령이 있어 브로콜리를 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상준이는 처음 하는 농장일이라 그런지 요령도 없고, 속도도 느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슈바는 우리 사이로 와서 우리가 놓친 브로콜리들을 순식간에 땄다. 슈바는 라인 전체를 보며 뒤처지거나 놓친 브로콜리를 따는 것에 집중했다. 트랙터가 한 번 지나간 자리는 다른 이유 없이는 다시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업장 전경, 여러 대의 트랙터와 빈들

고용불안은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힘든 작업


브로콜리 밭은 무척이나 넓었다. 이전 내가 경험했던 밭의 2배는 되는 길이었다. 한 번 왕복하면 바로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것조차 엄청 길게 느껴졌다. 처음 일하는 상준이는 힘들어했다. 칼을 잡는 손이 아프다고 했다. 반복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었다. 가슴은 아프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준이에게 다른 도움을 줄 수 없어도 일할 때 어떻게 하면 손이 덜 아프게 브로콜리를 딸 수 있는지에 대한 요령을 알려주었다. 상준이는 요령을 알게 된 것과 별개로 이 일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곳에 일하는 사람 중 몇 명이나 그 일에 맞을까 싶었다. 모두들 맞아서 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니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슈바는 우리의 속도가 느려 처지는 것을 보고 신경 쓰이는  듯했다. 나와 상준이를 빼고는 전부 대만 워커들이었는데 대부분이 경력자들 이어서 자신의 줄을 마치고 옆 줄까지 도와줄 수 있는 작업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작업 요령을 배우기도 했지만 작업요령과 별개로 그들의 숙련된 몸짓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우리는 계속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가랑비를 피해 차 안에서 탄산음료수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딱딱해진 빵이 잘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밥보다는 먹기 수월했다. 점심시간은 짧았다. 토스트를 다 먹고, 과자를 먹고 있으면 다시 모이라는 슈바의 말이 워커들을 통해 퍼졌다.


트랙터들이 도열하고 그것에 맞춰 워커들이 섰다. 워커들은 전사들 같이 보였다. 브로콜리 밑동을 자르는 작은 칼이 큰 칼처럼 보였고, 그들의 눈에선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꼈다. 트랙터에 시동이 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워커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트랙터가 반대편 끝에 도착하기 전에는 쉴 수 없는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워커들은 쉴 새 없이 허리를 굽혔다 펴며, 브로콜리를 따서 빈에다가 넣었다.


작업은 8시간 살짝 못 미치게 하고  마무리되었다. 슈바는 우리 둘에게 잘했다고 했으나 조금 더 빨리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와 상준이도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쾌적했던 옮긴 숙소

호주는 덥다고? 천만에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따뜻한 라면으로 몸을 녹였다. 앞으로 이렇게 얼마나 더해야 하는지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 막막했다. 아예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마음을 놓고 적응하려고 노력해볼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조만간 닭공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아티나 브로콜리 밭 3일차, 우리는 2일차 일을 마치고 숙소를 옮겼다. 다른 대만 워커들이 지내는 일반 집이었다. 임시 숙소보다 훨씬 아늑했다. 방도 넓고 컸다. 주방도 넓고, 깔끔했다. 임시 숙소의 주방은 전기스토브여서 오래 걸렸지만 이 곳은 가스스토브였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포아티나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새벽에 일어나 시리얼로 아침을 해결하고, 토스트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한다. 밤새 이슬과 낮은 온도로 얼어붙은 브로콜리 잎들은 딱딱했다. 그 잎들을 제치고 브로콜리를 따다 보면 방수가 되는 작업복 바지 안이 다 젖을 정도로 잎이 흠뻑 젖어있었다.


손이 아픈 것과 함께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추위였다.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다.  우리나라가 여름으로 갈수록 이쪽은 추워지고 있었다. 호주에서 제일 남쪽에 위치한 타즈매니아는 호주 대륙보다 더 빨리 겨울이 찾아올 뿐만 아니라 길다고 했다.


작업을 할 때는 면장갑 하나를 먼저 낀 후 고무장갑을 그 위에 끼고 일을 한다. 작업을 하다 보면 고무장갑이 조금씩 찢어지게 되는데 그 사이로 물이 들어와 손이 얼기도 했다.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느끼기 어렵지만 작업 중간 쉬는 시간에는 손이 차가워 장갑을 벗고 말려야 했다.


상준이와 나는 점점 일에 익숙해져 갔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데본포트 닭공장이 떠나질 않았다. 임시로 하는 직업이라 생각하니 열정도 없었다. 시키는 일만 하게 되고, 속도도 나질 않았다. 슈바는 고까운 눈치였지만 워커가 부족했기에 우리들에게 나오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포아티나 마을 전경 / 무지개와 구름 그리고 하늘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기회가 찾아오다!


포아티나는 타즈매니아 중앙에 있는 시골 마을로 근처에 큰 타운 또는 도시가 없었다. 차가 없는 우리는 포아티나 동네를 걸어 다니는 것이 유일한 우리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주말이 되어도 파티 같은 것은 없었다. 돈이 없어 여유가 없던 우리도 우리가 먼저 그런 자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시간은 흘렀다. 우리는 1주일 연속으로 일을 나갔다. 농장에서 연속으로 1주일을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몸은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그리고 내가 받을 페이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한 주를 마치고 주말을 만끽하던 찰나 재익이형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주에 닭공장에 자리가 날 것 같다는 전화였다.  나는 재익이형에게 여기 일을 하루만 빠지고 가서 지원하고 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려면 재익이형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가 데려다 주고, 다시 가야 했다.


나와 상준이는 계속 브로콜리 농장에서 일할 것인지 닭공장으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상준이는 처음부터 브로콜리를  힘들어했고, 농장이라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브로콜리 농장이 힘들어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꾸준히 한다면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로콜리 농장에 온 본 목적이 닭공장 지원을 대기하면서 생활비라도 벌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나는 본 목적을 상기하며 가기로 마음먹었다.


슈바에게 문자로 나와 상준이가 더 이상 일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슈바는 전혀 아쉬운 기색 없이 알겠다며 여태까지 수고했다는 문자만 돌아왔다. 원래 호주에서는 ‘노티스’라는 개념이 있다. 일을 끝내건, 집을 빼던 간에 2주 전에 통보를 해야 하는 것이 예의며, 일반적이다. 이번 경우처럼 떠나기 직전에 연락하면 일한 돈을 못 받거나, 조금 떼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슈바에게 우리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던 존재였던 것 같다. 이곳은 집이 일과 연계된 곳이어서 집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닭공장이 되어서 일한들 쉽지는 않겠지만 브로콜리 작업의 강도가 워낙 셌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는 데본포트로 가기로 했다. 재익이형은 우리를 데리러 먼 길을 왔고, 우리는 꿈과 짐을 가지고 다시 데본포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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