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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가 Sep 17. 2015

#19 닭쳐!

드디어 닭공장에 지원하다

육지와 타즈매니아를 이어주는 SPIRIT OF TASMANIA

다시 데본포트로 오다


데폰포트로 가는 일은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아마 설렘의 이유는 나와 상준이가 치킨 공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익이형도 우리를 픽업하러 오기 전 확실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고, 우리 또한 재익이형을 믿고 있었다.


1주일 만에 다시 온 데본포트는 편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들었다. 타지 생활이 다 비슷할 것 같다.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움에 설렘과 불안이 뒤섞이고, 내가 아는 곳에 있으면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헤쳐나 갈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 재익이형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나는 지원서를 낸 적이 있었지만 연락이 없었고, 상준이는 지원서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둘 다 지원서를 내기 위해서였다. 어느 나라든, 새벽 4시 30분의 공기는 차갑다. 이불 속을 빠져나가기 힘들지만 일어나 씻었다. 재익이형이 도시락을 챙기는 동안 나와 상준이는 쏟아지는 잠에 취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재익이형 차를 타고 20분쯤 달렸을까? 공장이라고는 있지 않을 것 같은 허허벌판 산골에 공장이 있었다. 재익이형은 바로 출근해야 했고, 나와 상준이는 오피스가 열리기 전까지 차에서 기다렸다. 1시간쯤 기다렸을까? 오피스에 불이 들어오고 나와 상준이는 준비해간 레쥬메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굴에 주근깨가 반이었던 젊은 오지 직원은 우리에게 작성할 서류를 주며 이것을 작성하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절박했고, 재익이형과 다른 워커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들에게 들었다며 빈자리가 있지 않냐고 물었다. 직원은 아직 자리가 없다며 자리가 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아서 실망했지만 일단 작성한 서류 뒤에 레쥬메를 첨부해 스테이플러로 찍고 제출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장 들어가는 것에 이렇게 목을 맬 줄이야. 하지만 내 현실은 그래야만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려웠다. 무엇이 도전이고, 무엇이 열정인지 헷갈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뚜렷한 목표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목표가 있었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일하는 동안에는 일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집에 걸려 있던 액자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지원서를  제출했어도 언제 연락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힘들긴 해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일을 그만두고 온 상황이었기에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있는 법이다. 나와 상준이는 우리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닭공장에서 연락이 오기 전 매일 가서 얼굴도장이라도 찍어야 했다. 


우리는 매일 닭공장 사무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사무실 직원이 다른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칼 쓸 줄 아냐고 물었다. 나와 상준이는 재익이형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 쓸 줄은 모르지만 쓸 줄 안다고 대답했다. 다른 워커들도 다들 칼을 쓸 줄 모르지만 일하면서 배웠다고 했기에 우리도 그럴 심산이었다.


공장 직원을 따라 사무실을 나와 공장으로 갔다. 우리에게 장화와 작업복을 입혔다. 나는 내심 이제 진짜 닭공장에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헌데 조금 이상했던 점은 정식 채용하기 전에 하는 인덕션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인덕션은 나중에 하나 보다라는 생각으로 일단 공장 직원을 따라갔다.


공장 직원은 작업복을 입고 기다리던 우리를 공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공장 안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생닭을 그렇게 많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닭을 손질하고, 포장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장 직원은 우리를 공장 한 켠에 마련된 닭 해체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그 테이블은 생통닭 한 마리를 봉에 끼우고 닭가슴살, 날개, 다리, 껍질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약간 긴장했지만 일을 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아시아 사람이 왔다. 우리를 가르쳐줄 트레이너인가 싶었다. 그 사람은 칼 잡아봤냐는 질문을 했고, 우리는 닭공장에선 일한 적은 없지만 열심히 배우겠다고 준비해간 말을 했다. 실망한 표정을 안은채 트레이너는 닭 해체 작업을 보여주었다.

 

데본포트 해변가에 있는 동상

워홀은 실전이다


그의 손놀림은 빨랐다. 통닭 한 마리가 분해되는데 채 30초가 걸리지 않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는 한 마리를 다시 꽂고 작업했다. 먼저 닭껍질을 벗기고, 양 가슴살을 분리한 후, 닭 다리 2개를 그 다음엔 닭 날개를  분리했다. 시장에서 잘라주듯 토막 내는 것이 아니라 닭의 뼈 위치를 알아 살만 분리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숙련도가 필요했다.


트레이너처럼 보이는 사람은 우리에게 칼을 건네며 해보라고 했다. 나와 상준이는 당황했다. 두 번이나 보여줬지만 정말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상준이는 나보다 먼저 하게 되었다. 칼을 쥔 손은 어설프게 닭을 자르기 시작했다. 방금 트레이너가 썼던 그 칼인데 칼이 잘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상준이는 닭을 다 자르지도 못한 채 트레이너의 말에 칼을 놓았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트레이너가 한 것과 어설프지만 상준이가 한 것도 보았으니 나는 조금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칼을 들었다. 내 머릿속 이미지로는 트레이너처럼 능숙하게는 아니더라도 분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닭을 봉에 꽂고 해체를 시작했다. 제일 처음 하는 닭 껍질을 통째로 벗기는 작업부터 난관이었다. 닭을 봉에 꽂으면 닭의 머리 부분이 위로 올라온 상태다. 그 상태에서 껍질에 칼집을 내고 힘으로 한 번에 껍질을 벗겨야 했다. 처음이다 보니 칼집을 어디에다 내는지 눈대중으로 봐서 잘 내지도 못했고, 힘이 다 들어가지도 않아 닭껍질이 너덜너덜하게 벗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닭껍질을 다 벗겨내고 닭 가슴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내 칼을 아까 트레이너가 쓰던 그 칼임에 틀림없는데 칼이 잘 안 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닭 뼈의 위치를 잘 몰랐기 때문에 살이 아닌 뼈 쪽으로 칼이 자꾸 가서 칼이 안 들었던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을 트레이너는 “Excuse me”라고 말하며 내 칼을 빼앗아 닭가슴살을 도려내고 다시 칼을 주었다.


나는 이미 속으로 닭공장은 끝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 닭 다리와 닭 날개를 시장에서 토막 내듯이 겨우 분리시킨 후 트레이너의 표정을 보니 참담했다. 트레이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와 상준이에게 수고했다며 나가서 사무실 직원에게 가라고 했다.


우리를 구해준 에이전시 'GD'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만감이 교차했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이렇게 날리다니. 닭공장에 들어오지 못하면 그 다음 계획은 없었다. 나와 상준이는 나와서 오피스 직원에게 닭 해체하는 작업 말고 아무 일이라도 할 테니 자리가 없냐고 물었지만 지금은 닭을 해체하는 ‘보너’만 뽑는다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허탈은 웃음을 지었다. 허탈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닭공장 입성에 실패한 우리는 서로의 칼질을 지적하며 웃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직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재익이형이 올 때까지 쉬었다. 당연히 닭공장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무산되니 어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 때문에 농장일도 없어져가는 때여서 더욱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익이형이 퇴근하고 집에 왔다. 재익이형은 미안한 마음의 표정이었다. 자신도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나와 상준이도 재익이형 탓만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워홀이기 때문이다. 다시 본토로 나가서 시티잡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데본포트에 이미 등록되어있는 농장 에이전시들이 있으니까 여기서 계속 버텨볼까? 아니 그냥 이 고생할 바에는 한국에 돌아갈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뒤죽박죽 만들었다. 워홀이 그렇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가치관을 흔들 때,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 편안하고 익숙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약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잘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고, 처음부터 자전거를 잘 탈 수는 없는 법이다. 우연히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어 남들보다 먼저 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그런 경우는 극소수다. 평범한 사람이 하는 평범한 노력으로는 큰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다.


나와 상준이 그리고 재익이형은 한 동안 말없이 소파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늦어졌고, 재익이형은 내일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때 나와 상준이에게 문자가 왔다. Vmac에어전시가 아닌 다른 에이전시였다. 며칠 후에 무농장 일이 있는데 해보겠냐는 문자였다. 신이 있다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당장 내일 에이전시로 와서 서류작업을 하자고 했다. 우리는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한다고 답장을 보냈다. 재익이형도 닭공장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운 좋게 우리가 잘 풀리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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