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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가 Sep 21. 2015

#24 나라쿠트로 가다

두 달 방황의 종착지 나라쿠트에 가다

서든 크로스 역에서 상준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다

험난한 지역 이동


멜버른에서 나라쿠트까지 가는 길은 450km 정도 된다. 멜버른 서든 크로스 역에서 표를 끊으면 기차를 타고 간다. 그래서 나는 기차를 타고 나라쿠트까지 가는 줄 알았다. 열차는 서든 크로스 역을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금세 멜버른 외곽으로 나왔다.


멜버른 외곽은 거의 농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천안행 1호선 열차를 타고 아산역 가는 느낌이 들었다. 천진난만한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불안과 걱정이 뒤섞였다. 만약 갔는데 이상한 사람들만 있으면 어떡하지? 일이 힘들면 어떡하지? 등등 걱정해도 소용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뒤죽박죽 만들 때 나는 잠이 들었다.


사람들의 인기척 소리에 잠이 깼다.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450km가 이렇게 금방인가? 하고 깼는데 나라쿠트와는 이름이 완전히 다른 ‘발라랏’이라는 곳에서 내려주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가 하고 역무실로가 물어보았다. 나라쿠트로 가고 있었는데 이곳에 버스가 멈췄다고 말했다. 역무실 직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기서 버스로 갈아타고 호르샴이라는 곳까지 가고, 호르샴에서 나라쿠트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발라랏 역

멜버른에서 끊어준 나라쿠트로 가는 기차 표는 호르샴까지 가는 요금이 포함되어있던 것이고, 호르샴까지 가면 30분 정도 후에 나라쿠트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멜버른에서는 나라쿠트까지 가려면 그 기차를 타야만 했던 것이다. 즉 멜버른에서 나라쿠트로 가는 직행 버스나 기차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발라랏에서 그 사실을 알았고, 일단 무사히 나라쿠트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시드니에서 타즈매니아, 타즈매니아에서 멜버른, 멜버른에서 나라쿠트, 앞 두 번의 지역 이동에서는 비행기로 이동했다. 그래서 짐이 무거워도 공항까지만 가고 나면 수화물을 부칠 수 있어서 짐 걱정은 없었다. 헌데 멜버른에서 나라쿠트로 가는 길에는 대중교통을 계속 바꿔가며 가야 해서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발라랏에서 멈춘 기차가 떠난지 10분 정도 됐을까? 호르샴행 버스에 불이 들어오고 탑승이 시작되었다. 대형 버스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운전기사님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루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대중교통에 있어보기도 처음이었다. 끊없는 초지와 방목으로 키우는 양과 소들이 창밖의 전부였다. 


드넓은 초원과 파란 하늘 그리고 손에 잡힐 것 같은 구름들

불안과 걱정은 내 친구


불안과 걱정을 하지 않고 싶어 안정과 평화를 찾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세상은 급변하고, 날 둘러싼 상황도 계속해서 변한다. 워홀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영어 실력이 있고, 준비를 한다고 해도, 주변에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 없는 환경이어서 일을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자신은 영어도 잘 안되고, 능력도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전전긍긍하다가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받아 잘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은 걱정되고 떨리는 마음과 이제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환경과 상황이 계속 바뀌는데 나만 초조해하고,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나 역시 상황에 따라 몸의 색을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처럼 나 자신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어야만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조금 더 노력하고, 여유로운 상황에서는 조금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말이다.


호르샴 터미널 안내판

앞으로의 생활이 어떻게 펼쳐질지 몰라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호르샴에 도착했다. 호르샴에서 나라쿠트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있어 가까운 마트로 가 먹을거리를 샀다. 호주에 온지 2달이 되어가지만 아직까지도 외국 마트에 가면 신기했다. 우유와 빵 그리고 사과를 사서 버스터미널로 왔다. 버스터미널이라기 보단 버스 정류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드디어 나라쿠트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길고 긴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버스였다. 중간에 들르는 타운들 빼고 버스가 가는 길에는 별 다른 것이 없었다. 초지와  농경지뿐이었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지형도 아니기에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보며 타즈매니아 농장에서 고생했던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끝이 안 보이는 브로콜리 밭에서 브로콜리를 따고, 팔이 저릴 정도로 파를 뽑았던  그때 생각들을 하니 까마득하기도 하고, 내가 일을 했나 싶기도 했다. 추억으로 남은 시간은 뒤로 한 채 버스는 고속도로라고 불리지만 국도 같은 길을 내달렸다. 버스는  중간중간 작은 타운에 들러 소포를 전달하거나 받기도 했다. 그 시간에 화장실을 갈 정도는 되지 않았다. 장거리 버스 중에는 버스의 맨 뒤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 버스는 장거리 버스는 아니었다.


멜버른에서 나라쿠트까지 오는 대중교통 시간표

나라쿠트에 도착하다


여러 타운을 돌고 돌아 마침내 출발한지 7시간이 넘어 오후 4시가 넘어 도착지인 나라쿠트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고, 나도 잠에서 깨 서둘러서 짐을 느렸다. 나는 24인치의 트렁크 하나와 백팩을 매고 있었는데 꽤나 무거웠다.


울월스 앞에 버스 정류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표지판 하나 덩그러니 서있는 곳에서 만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쿠트로 오기 전 메이이모에게 소개받은 사람이었다. 내가 살게 될 집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 사람에게 전화하니 곧 오겠다는 말과 함께 맥도널드 앞으로 오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른쪽에 맥도널드가 있었다. 나는 트렁크를 끌고 맥도널드 앞으로 갔다. 집이 좀 멀리 있는지 오기로 한 사람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빛바랜 하늘색 포드 승용차에서 내린 그는 키가 180이 넘어 보였고, 덩치도 좋아 보였다. 머리는 9mm로 반삭발을 한 상태였다. 눈매는 서글서글하고, 얼굴엔 웃음기가 있었다. 나는 약간 위축되었다.(훗날 이 날을 회상하는 그 친구의 말에 언제나 웃게 된다.) 내 짐을 들어 트렁크에 실어주고는 가까운 잡화점에 들러 전기장판 좀 사오겠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만난 잘 모르는 사람에게 경계감을 느끼는 나는 계속 그를 살폈다. 전기장판 3개를 사온 그는 이 중 한 개는 내 것이라고 했다. 몇 마디 주고, 받으니 그 사람은 나와 동갑내기 친구였다. 이름은 민성준이고, 워홀 온지 반년이 넘은 친구였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아까 기다렸던 시간이 있어 꽤 멀리 갈 줄 알았는데 집은 바로 앞이었다. 차로 1분 거리에  있었다. 주차장은 집 앞 쪽에 있었다. 차를 대놓고 짐을 빼서 집으로 갔다. 집은 유닛형식이었다. 단독으로 있는 집이 아니라 여러 채가 붙어있는 형식의 집이었다. 내가 살 집은 유닛3였는데 첫 번째로 보이는 집 그 다음 집이었다.


상태는 썩 좋지 않았지만 아늑했던 우리 방, 오른쪽이 내 침대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정감이 가는 집


집의 외관은 조금 오래돼 보였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상태가 조금 안 좋았다. 내가 타즈매니아에서 지내던 집은 조금 비싸긴 했어도 깔끔하고, 신식으로 지어진 독채 집이었다. 내가 경험한 것과 자연스럽게 비교가 돼서 나는 마음속으로 실망했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는 화장실 그 옆에는 내가 살 방이었다.


내 방문을 열어 먼저 와있던 룸메이트와 인사를 시켜주었다. 룸메이트 이름은 김영하인데 소설가 이름과 같아서 기억하기 쉬웠다. 안경을 쓰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단단한 몸이 인상적이었다. 방 안에는 침대 매트리스와 가구들이 있었다. 성준이는 아까 산 전기장판을 주고 깔고 자라고 했다.


짐을 놓고, 집을 구경했다. 우리 방을 나가 오른쪽으로 꺾어 1m 가면 바로 샤워실이 있었다. 역시나 시설은 좋지 않았다. 그 옆에는 우리 방만한 크기의 방에 2명의 워홀러들이 있었다. 그 방에서 앞쪽으로 걸어가 왼쪽으로 꺾으면 거실 겸 주방이 나왔다. 주방 역시 내가 살던 곳과 비교하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정감이 갔다.

주방 바로 옆에는 창고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마스터(집주인을 일컫는 말이다. 집을 산 것은 아니고 자신이 빌려서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에게 방을 임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방이었다. 실제로 창고였는데 자신이 집의 마스터가 된 후 정리하고, 방으로 개조했다고 자랑했다. 주방을 지나 맨 안쪽에 있는 방은 무척이나 컸다.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3인실 방이었는데 3인이 써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집 구경을 마치고 나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집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좋아 보였다. 룸메이트는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놓은 것을 보니 조용하고 깔끔한 성격인 것 같았고, 마스터인 성준이도 서글서글해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였다.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식이었다.

한국인의 정을 느끼다


나는 고기공장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고기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인덕션을 봐야 하는데 그것을 기다려야 했다. 즉, 나는 잡 웨이팅을 해야 했다. 잡 웨이팅을 기다리면서 고기공장에서 필요한 q-fever(이하 큐피버) 주사도 맞아야 했다. 어떤 공장은 큐피버를 자비로 맞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갈 공장은 인덕션을 보면 공짜로 맞춰준다고 했다.


메이이모 말로는 인덕션이 언제 있을지는 모르지만 곧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생활비가 다 떨어져 가는 상황이어서 그 전에 다른 일이라도 해야 했고, 이곳에서는 사과를 따거나 포도나무 가지 치는 일인 ‘푸르닝’이 있다고 했다. 마스터인 성준이가 일을 알아봐주기로 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곳에 적응하는  일뿐이었다. 내 룸메이트 영하는 온지 며칠 안 되었다고 했다. 자신도 나처럼 고기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대기하는 동안 영하와 같이 농장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면 좋을 것 같았다.     


저녁이 되고, 공장 출근했던 사람들이 퇴근했다. 성준이는 새벽 5시쯤 가서 오후 3시쯤 끝나는 보닝파트였고, 5시 넘어서 온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시작하는 킬 플로어 파트였다. 아예 오후 2~3시부터 시작해 밤 12시에 끝나는 오후반도 있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돼 저녁을 하러 주방으로 갔다. 주방은 분주했다. 내가 저녁 먹을 준비를 하려고 하니까 준비하지 말라며 성준이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이곳의 환영인사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같이 밥을 먹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방으로 가서 기다렸고, 30분 정도 후에 밥 먹자며 나와 영하를 데리러 왔다.


식탁 위에는 돼지불고기와 된장찌개가 차려져 있었다. 타즈매니아에서 한식을 먹고 왔지만 이렇게 푸짐하게 차려진 한식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성준이는 만날 이렇게 먹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상추에 돼지 불고기를 싸서 먹기 시작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두 그릇을 허겁지겁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공장에 다니는 쉐어메이트들은 공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어느 파트가 좋고, 어느 파트가 힘들다 등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는데 정신이 없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았다. 여하튼 요점은 들어가기 전에 푹 쉬라는 것이었다. 일하기 시작하면 간절히 쉬고 싶을 것이라 했다.


워홀 와서 1달 이상 한 곳에서 꾸준히 일해 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짐작과 현실은 하늘과 땅 사이라는 것을 농사일을 통해서 느꼈으니 아마 공장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잠깐 앉으라고 했다. 다 같이 먹은 음식의 설거지 당번을 정하기 위해 가위 바위 보를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우리 집 룰 중 하나였는데 밥을 다 같이 먹고 나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당번을 뽑는 것이었다. 나는 운 좋게 이겼고, 영하가 걸렸다. 사람들은 처음에 와서 설거지를 하면 좋은 포지션에 들어가게 된다는 징크스 같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새롭고, 낯선 곳에서의 시작은 나를 긴장하고, 위축되게 만든다. 하지만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좋고, 재미있으면 그 긴장과 위축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일을 잘 버티고, 잘 적응하는 것만 남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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