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작가 Sep 26. 2015

하기나 해

Just do it


맞아, 돌이켜 보니 술잔 부딪치며 개똥철학을 논할 때 보다 움직였을 때 무엇인가 얻거나 잃었던 것 같다.


분명히  그때의 개똥철학이 날 움직이게 한 것도 있다. 매일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직 찰랑이는 잔과 내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만 있다면 어디든, 언제든 누비고 다녔던  그때 말이다.


하긴 그 때도 움직였다. 초록병을 찾아다니려면 꽤나 부지런해야 했다. 하지만 혓바늘이 항상 돋아 있었다. 눈 밑은 검고, 잠을 자도 자도 피곤했었다.


2년 전 동기들은 취업하고 후배들도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을 때였다. 친구들이 뛰는 모습을 보니 내심 불안했는지 이제 몸 좀 풀어 볼까? 했다. 헌데 난 신발끈을 묶고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가을까지의 나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현실의 중압감을 피하기 위해 뇌를 마취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나의 길인지도 모르는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하니 어색하기도 하고, '이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연히 주변인들과 다른 길이니 속도도 방향도 다른 것인데 처음엔 그들과 비교하는 습관의 관성 때문에 고생했었다. 시간은 묵묵히 흘러갔고 이제 그 비교의 틀을 하나씩 해체하고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길의 초입이지만 2년 정도 다른 길을 걷다 보니 이제 조금은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앞길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길 말이다.


인생은 그저 여행일 뿐인데, 그냥 하면 되는데 뭐 그리 생각을 많이 했는지 모겠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고, 마음이 끌리면 끌리는 대로 사랑하고, 행복하면 의심 말고  행복해하고, 가슴이 미어지면 울면 된다. 이것 뿐인데. 내가 울어도 될까? 내가 만나도 될까? 내가 시도해도 될까? 이런 의심과 걱정으로 나의 젊고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낸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산다는 것이 자유와 방종을 구분 짓지 못해 그런다 생각한다면 그 인생 또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인다.


등산 중에 힘이 부쳐 중턱 즈음에서 만나는 하산객들에게 "여기서 정상까지 얼마나 걸려요?"라고 물어보면 하산객들은 항상 "다 왔어 좀만 더 가면 돼"라고 말한다.

굳이 정상을 봐야 하는가? 중턱까지 오르는 길은 산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었는가? 이 산의 정상을 못 올랐다고 저 등산을 안해본 놈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아직도 한참 가야 돼요"라고 솔직히 말씀해주시는 하산객과 막걸리 한 잔 하고픈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자해지[結者解之]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