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작가 Sep 30. 2015

#39 벌써 일 년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애들레이드 Henley 비치에서 숙현이와 함께

휴가 후유증을 만남으로 극복


휴가에서 복귀한 나는 정신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꿈만 같고, 매일이 힘들었다. 10개월을 그렇게 했지만 1주일 정도 쉬었다고 이렇게 맥이 풀릴 줄은 몰랐다. 나라쿠트에서 휴가를 즐겼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휴가를 다녀온 사이에 내가 일하는 오팔룸에 새로운 한국인 여자가 들어와 있었다. 이름은 ‘숙현’이었다. 키가 크고, 예쁘장하게 생긴 친구였다. 육체노동이라고는 안 해봤을 법한 친구가 어설프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잠깐 도와주러 온 사람이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숙현이는 잠깐 도와주러 온 헬퍼가 아니라 오팔룸 고정멤버였던 것이다. 식사시간에 한, 두 마디씩 나누던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서로를 알아갔다.


워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남이다. 외국을 나왔으니 외국인을 사귀어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온 사람들도 있고, 와서 한국인과 사귀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인데 외국인과 사귀는 커플을 본 적이 있다. 한국인은 유창하진 않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 영어실력이었지만 한국의 섬세한 말 감성이 영어에는 부족했다. 뭐든 직설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불편함이라고 했다. 더불어 이야기를 깊게 할 수 없는 것도 단점이라고 했다. 단점을 뛰어넘는 사랑이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이다.


워홀에 온 혈기왕성한 청춘들 중에 외롭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저마다 외로움과 고독함을 가지고 있지만 마땅한 상대가 없고, 계속 이동해야 하는 워홀의 특성상 짧게 만났다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나는 공장이 1달 조금 넘게 남았고, 숙현이는 4개월 정도 일을 더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어느새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일터에서 인정해주는 열심히 일하는 예쁜 커플이 되었다.


여자친구와 일을  함께한다는 것은 힘든 일을 같이 이겨낸다는 점에서는 서로 도움이 되고, 격려를 해줄 수 있지만 때로는 계속 같이 있기 때문에 사소한 것으로도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지속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공장일 막바지에 접어들면 많은 워홀러들이 나태해지기 십상이다. 돈은 어느 정도 벌었고, 일을 하기 싫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두기 전에 슈바에게 알리는 일명 ‘노티스’는 2주 전에 알려주어야 한다. 어떤 워홀러들은 노티스 서류를 내지 않고 갑자기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노티스 서류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 2주 안에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공장일이 힘들고, 지겹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힘들었다. 힘이 되는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년을 끝까지 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누구나 일을 하면 돈을 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것에 합리화를 하고 그만둔다.  그때 당시에는 편하고, 좋은 결정으로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성급한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하게 될지 모른다.


웨이, 나, 탐, 숙현 / 장비반납 후 기념사진을 남기다

벌써 일 년


일은 나가기 싫었지만 시간은 잘 갔다. 마치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는 시간 앞에 나는 넋을 놓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흘러 마지막 주가 되고, 마지막 날이 왔다. 같이 일하는 동료 워커들은 마지막 날이냐고 물어보며 좋겠다고, 수고했다고 말했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는데 내일이면 다시 또 출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같이 일하던 뉴질랜드 마오리족 출신의 ‘나’아주머니는 나에게 환송 선물로 매점에서 치킨과 샌드위치 케이크를 사서 선물로 주었다. 항상 장난치며 재밌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베트남 아줌마 탐과 웨이, 조용하지만 잘 도와준 슈바 제이미, 장난꾸러기지만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도움을 준 블랙 등 워홀러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생각났다.


갓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긴장감부터 1년이 되고 마지막의 여유까지의 경험은 꿈처럼 느껴졌다. 식사시간이면 같이 밥을 먹던 워홀러 동료들은 나보다 늦게 와서 빨리 간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 모두 한 명씩 생각났다.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만들며 보냈던 1년이라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내가 1주일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1달이 지나고 3달이 지나고 6달이 지나고 1년이 되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한계란 자신이 결정짓지 않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 얼마나 내가 편하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고, 부모님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장을 끝내면 스토에서 장비 반납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자신이 공장에서 지급받았던 물품을 반납하는 것이다. 만약 반납하지 않으면 물품 가격이 마지막 주급에서 공제되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마친 다음 주 월요일 헬멧과 장화를 반납하기 위해 공장으로 갔다. 물품을 반납하고 물품 반납하면 받을 수 있는 종이를 인사과에 제출했다. 인사과에서는 레퍼런스를 받을 수 있는데 다른 일자리를 구할 때 도움이 되는 추천서다. 예전에는 짧게 일해도 주었지만 근무 태도가 좋지 않은 워홀러에게는 레퍼런스를 발급해주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레퍼런스를 받고 공장을 나왔다.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이 들면 섭섭하기보단 시원하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아마 나도 똑같은 심정인 것 같다. 시원한 것 같다.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로워졌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멜버른 페닌슐라 노천온천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다


공장을 다니는 워홀러들은 한 곳에서 일을 마치기 전에 다른 곳에 일을 알아보고 움직이는 것이 기본이다. 일단 지원해놓고, 가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으면 지금 다니는 공장을 정리하고 움직인다. 나 역시 다른 지역으로 갈 생각은 있었지만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1년 동안 일했으니 1~2달 정도는 쉬어야지라는 생각으로 나라쿠트에 남아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나에게 주어진 매일의 24시간이 벅찼다. 그도 그럴 것이 일할 때는 하루에 12~13시간씩 일터에 있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내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서 무엇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일단 꾸준히 운동하고 책을 읽기로 했다. 이곳을 떠나도 일은 좀 더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체력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했다. 책을 읽는 것은 내가 일을 다닐 때 책을 읽고 싶어 했지만 시간 핑계, 체력 핑계로 잘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간 적이 많았다. 이번에는 핑계가 없으니 책을 읽어보자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자꾸 실패했다. 늦잠을 자거나, 날이 흐린 날은 운동을 안 나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워홀의 일부분이 아니라 인생의 일부분이라 생각했다.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고 3주차가 되니 어느덧 습관이 돼가고 있었다. 좋은 습관이 나를 더욱 신나게 만들었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고요한 아침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하는 일은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다. 나에 대해서 더 깊고, 솔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 역시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불현 듯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가장 잘 알고, 몸소 체험한 워홀 이야기부터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워홀온 처음부터 기억을 더듬으며 써나 가기 시작했다. 매일 2시간씩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썼고, 결국 이 글이 완성되었다.


워홀을 온 사람이라면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고, 행동지향적이고, 호기심이 많고,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내면을 들어다 보는 시간이 중요하다. 워홀에 와서 돈을 벌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시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목표가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워홀은 과정이 되고, 목표를 위한 과정은 즐거워지기 마련이다.


내 옆에 검은색 옷을 입은 운영이 그리고 쉐어메이트들과 함께

나라쿠트를 떠나다


2달이 가깝게 쉬면서 매일 여자친구가 퇴근하고 오면 미리 저녁을 준비해 식사를 같이했다.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여자친구를 배려하려고 노력했고, 여자친구 역시 나의 배려에 감사할 줄 아는 여자였다.

    

쉬는 기간이 점점 늘어 2달이 다 되어 갔다. 나는 원래 아는 사람 소개로 멜버른 근처에 있는 고기공장으로 가려고 연락이 오면 그쪽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았고, 기약이 없었다. 나는 직접 알아보기 시작했고, 머레이 브릿지라는 애들레이드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양 공장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 번 공장을 해보니 농장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시티에서 일을 하자니 시급이 높지 않았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한 번 했던 것이 익숙해서 나는 공장을 다시 지원했다. 운이 좋게 자리가 있었고, 나와 함께 일하던 지훈이 형과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지훈이 형은 세컨비자가 안 나와서 공장에서 잘린 상황이었다. 나와 지훈이 형이 먼저 머레이 브릿지로 가고, 여자친구는 나라쿠트 공장이 끝나면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라쿠트를 떠나는 날이 왔다. 1년 2개월을 지내던 곳을 떠나려니 마치 집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환송회 자리가 마련되었고, 이미 많은 친구들이 떠났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친구들이 와주었다.


운영이는 전 마스터 성준이의 한국 친구다. 운영이가 처음 왔을 때부터 서글서글한 인상에 웃음이 많은 모습이 성준이와 비슷해 정감이 갔다. 운영이는 성준이가 있을 때 우리 집에 살다가 성준이가 떠나고 나서 다른 집으로 이사 갔지만 왕래는  계속하고 있었다. 운영이는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같이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이 다 먼저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운영이는 살짝 취기가 올랐고, 나는 많이 마시지 않아 괜찮았다. 운영이가 집에 가겠다며 집을 나섰고, 나는 배웅하러 집 밖으로 따라 나섰다. 운영이는 수고했다며 나를 안아주었고,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쉬움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5분을 울먹거리며 건강히 잘 지내고, 나중에 보자고 했다. 마음이 뭉클했다. 이별에 민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주는 친구를 타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나라쿠트를 떠나는 날 아침, 호주 올 때는 캐리어 하나에 가방 하나였는데 왜 이렇게 짐이 많아졌는지 차에 짐을 실으니 트렁크와 뒷좌석이 꽉 찼다.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까지 챙기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짐을 싸고 나라쿠트를 떠나려고 하니 정말 이상했다. 일이 끝났던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쿠트에 정이 많이 든 것 같았다.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라쿠트를 떠났다.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나라쿠트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37 호주에서 떡국을 먹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