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작가 Oct 03. 2015

#41 일의 중요성을 깨닫다

삶의 반은 일이다. 즉, 일은 삶이다.

스킨 쉐드 작업장으로 올라가는 길 도축을 기다리는 양들

여자친구 덕에 보직이동


스킨 쉐드에서 하는 일은 정말 단순, 반복적이었다. 그리고 힘들었다. 여행을 위한 돈을 더 벌러 머레이 브릿지로 와서 일하는 것이었던 나는 자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번다고 뭐가 달라질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지만 버텼다.


일을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나 여자친구도 나라쿠트 공장에서 비자가 끝나고 내가 있는 공장으로 왔다. 머레이 브릿지 공장은 대체적으로 여자들에게는 쉬운 일을 시키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는 야간 보닝 팩커로 들어갔고, 소공장에서 하던 소 특수부위 패킹보다는 한결 쉽다고 했다.


나와 여자친구는 같이 오후 쉬프트라 출, 퇴근을 같이 할 수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스킨 쉐드는 기본 1시 30분은 돼야 일이 끝났지만 여자친구는 11시에서 늦어도 12시 사이에 일이 끝났다. 여자친구는 일이 끝나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여자친구는 기다리는 일을  힘들어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해봐도 나 역시 그럴 것 같았다. 


1주일 동안 나를 기다렸던 여자친구는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나에게 보직을 바꿀 것을 권유했다. 나 역시 보닝룸으로 가고 싶지만 워홀러가 많은 공장 특성상 보직변경이 쉽지 않다. 한 명 바꿔주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신이 가고 싶은 보직으로 바꾸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녀는 확신에 차서 나를 보닝으로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매일 늦게 끝나고, 일에 지쳐있는 모습에 상당히 가슴 아파했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어 그녀는 그녀의 담당 슈바에게 통사정을 했고, 보닝 슈바와 스킨 쉐드장 슈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결과 나는 그 주 금요일까지만 스킨 쉐드장에서 일하고 다음주부터 보닝룸으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옮기게 되어서 기뻤다.


똑같은 공장일 같지만 하루 8시간 이상 머무는 공장에서 작은 것이 큰 차이가 된다. 스킨 쉐드장과 보닝룸은 일단 작업 환경부터 차이가 났다. 양가죽을 세척하고 쌓는 쉐드장은 지붕이 있지만 옆면이 뚫려 있어 야외나 마찬가지였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작업장에서 고스란히 날씨를 이겨내야 했다. 반면 보닝룸은 양고기를 손질하고 포장하는 곳이라 청결이 가장 중요시 여겨진다. 고기가 녹지 않도록 에어컨을 틀기 때문에 약간 춥지만 일을 하다 보면 추운 것은 금세 잊게 된다.


미역국과 갈비찜으로 도시락을 싼 날

일은 삶이다


다음 주가 되어 여자친구와 함께 보닝룸으로 출근했다. 내 보직은 양 골반을 반으로 자른 정사각형 모양의 고깃덩어리를 비닐 주머니에 담아서 레일로 옮겨놓는 일이었다. 그 전에 내가 했던 일들에 비하면 정말 쉬운 일이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는 임산부가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스킨 쉐드장처럼 여기 저기 옮겨가며 일하는 것도 아니고 제 자리에 서서 레일을 따라 오는 고깃덩어리를 집어 비닐 백에 넣는 일이라 몸에 열이 나지고 않았고, 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더 추웠다.

그래도 몸이 편하기 때문에 한결 나았다. 여자친구와 함께 출, 퇴근할 수 있다는 큰 장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이 끝나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스킨 쉐드장에서 일할 때에는 일이 늦게 끝나기도 하지만 일 자체가 힘들어 몸이 버티질 못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커녕 늦잠을 자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스킨 쉐드장에서 일할 때는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보통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였다. 씻고 잠에 들면 2시에서 2시 30분 정도 되었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었지만 10시 전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반면 보닝룸으로 옮기고 나서는 일이 조금 늦게 끝나도 집에 와서 씻고 누우면 1시였다. 아침 7시면 조금 힘들지만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일인 글을 쓸 수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소공장에서 일할 때도 그렇고, 스킨 쉐드장에서 일할 때도 그렇고 하루에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나의 생활이 없었다. 소공장에 다닐 때는 오전 쉬프트라 일어나자마자 출근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씻고, 밥 먹고, 도시락 싸면 자야 했고, 스킨 쉐드장은 전날 늦게 자고 다음날 아침 늦게 일어나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오전반보다는 나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가는 속성 때문에 넉넉지 않았다.

     

공장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일했던 시간은 일과 내 생활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일 자체의 중요성도 인식할 수 있었다. 일터에서 오래 머물수록 돈은 많이 벌었지만 평일에 내 생활이 없었다. 주말엔 시간이 있었지만 1주일간 지쳐있던 몸을 이끌고 무엇을 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주말을 휴식으로 보내고 나면 다시 한 주가 시작되고 나는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이 일을 해야만 했다. 워홀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일과 생활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공장 일은 나에게 일의 중요성도 깨우쳐 주었다. 하루 24시간 중 절반인 12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머물고, 깨어있는 시간의 2/3를 일해 보니 일이 곧 내 인생이고,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 그저 생존을 위해, 밥벌이를 위해 하기 싫지만 해야 한다면 나는 내 삶의 절반을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삶은 재미있고, 위대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경제개발과 고속성정과 맞물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시대적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이 원하고, 열망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행복하고, 나답게 사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길을 찾고, 최선을 다해 그 길을 스스로 증명한다면 그 길에서 밥  먹고사는 일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함이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 같다.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남들이 이미 걸었던 길, 잘 닦여진 길을 걸어가려 한다. 앞이 보이는 길 말이다. 100명의 사람이 워홀을 오면 100가지 이야기가 있듯, 삶도 마찬가지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의 삶이 존재한다. 50명은 회사원의 삶, 20명은 자영업의 삶, 10명은 노래하는 삶, 10명은 전문가의 삶, 10명은 주부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원이면서 아마추어 무선통신에 대가일 수도 있고, 주부이면서 몸매를 잘 가꾼 몸짱 주부가 될 수도 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붕어빵 틀에 내가 반죽이 되어 붕어빵처럼 구워질 필요가 없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을 경험함으로써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워홀을 와서 많은 것을 깨닫고, 느끼겠지만 일의 중요성만 깨닫고 가도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보직 이동 후 쉬는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어 좋다

양갈비와의 전쟁


보닝룸으로 옮긴지 2주가 채 안되었을 때였다. 슈바가 나에게 오더니 종이 하나를 주고는 내일 store에 가서 흰 장갑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전 공장에서 1년 일했던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직변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보직에 맞는 물품이 면장갑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store에서 면장갑을 수령해 일터로 향했다. 바뀌는 보직이 뭔지 알지 못하는 나는 원래 하던 골반 고깃덩어리 포장을 하고 있었고, 30분 후에 슈바가 나를 데리고 보닝룸 내에 다른 보직으로 날 데려갔다. 새로운 보직은 직사각형으로 잘려오는 양갈비 고깃덩어리에서 지방층을 떼어내는 것이다. 양갈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소갈비처럼 rip형태인 직사각형으로 생겼다.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갈비의 옆쪽으로 갈비와 지방층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리고, 다시 위쪽의 갈비와 지방층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벌린다. 그 다음 약간 떨어진 위쪽의 지방층을 작업대에 설치된 갈고리처럼 생긴 후크에 꽂고 갈비만 잡아당기면 지방층이 벗겨진다.


양등갈비는 u형으로 생긴 양의 등을 반으로 갈라 왼쪽과 오른쪽 두 개가 나왔는데 나는 오른쪽 부분 담당이었다. 작업은 빨리 진행되었다. 10초에 하나씩 지방층을 떼어내야 하는데 만만치 않았다. 보닝룸에서는 하루에 약 2500마리의 양을 다듬고 포장했다. 고로 나는 하루에 2500개의 양갈비의 지방층을 뜯어내야 했다.


양은 며칠 전에 도살하고, 냉동 저장창고에서 저장되었다가 나오는 것이어서 얼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얼어있는 양갈비와 지방층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면장갑을 끼고 있지만 얼어있던 고기가 약간 녹으면서 생긴 물 때문에 금세 젖는다. 젖은 면장갑을 끼고, 얼어있는 고기와 지방층 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나중에는 손가락 끝이 얼어 감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가락과 팔목은 아파왔고, 혼자서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는 1주일만 적응하면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나아진다고 했다. 1달 정도 되면 완벽하게 적응된다고 했다.


파농장에서 뿌리채 파를 뽑을 때도, 브로콜리 농장에서 5초마다 허리를 숙일 때도, 소공장에서 박스를 밴딩 할 때도, 스킨 쉐드장에서 양가죽을 쌓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다 어려웠다. 당연히 몸을 쓰는 일인데 아무리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작업마다 쓰는 근육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하면 새로운 곳이 아프기 마련이다. 당연한 일을 나는 마치 큰일처럼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사수는 3일간 나를 가르쳐주고 떠났다. 나 혼자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사치가 되어버리고 갈비와 지방층 사이로 아픈 손가락을 집어넣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못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지만 몸은 움직였다. 사람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자신 스스로 단정 짓지 않는다면 물리적으로 몸이 버텨주는 한 자신의 한계는 자신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손가락이 아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씩 지방층을 떼며 버티다 보면 어느새 한 타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왔다. 


나는 또 그렇게 버텨냈다. ‘해냈다’는 표현보다 ‘버텼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매 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버텼다.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하루를 열심히 살다 보니 1주일을 열심히 살게 되고, 1달을 열심히 살게 되고, 1년을 열심히 살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이뤄낼 때 로또처럼 운이  좋아한 방에 이뤄낸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큰 노력 없이 그저 운이 좋고, 환경이 좋아 해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엇을 이뤄낸 것은 아니지만 노동을 통해 경험해보니 위대한 삶은 평범하고, 알찬 하루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하루 열심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했던 나의 옛날 생각이 부끄러웠다. 평범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알찬 하루가 곧 내 삶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p.s:구독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저는 현재 머레이 브릿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거진 연재는 11월경에 두 편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나도 간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매거진을 구독해주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유익하고, 재밌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나도 간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매거진만 구독하신 분들은 저의 다른 글들의 알람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다른 글들도 읽고 싶으신 분들은 제 브런치를 구독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