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lf Feb 09. 2021

익숙한 Panic과 무기력감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제 그만할까?"

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난 새벽 근무를 해야 했다. 나에게 맡겨진 시간은 새벽 1시 반부터 7시 반이었는데, 다시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났고, 끝내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소리 내어 "진우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란 말만 수없이 되뇌었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어떻게 어떻게 끝낸 근무였지만, 잠에 들기 직전에도 다시 패닉이 왔었다.


극심한 강도였지만, 새롭진 않은 고통이었다. 고통은 마치 나를 예의 주시하는 귀신처럼 약해진 틈을 타서 반 죽여놓고 갔다. 입대 전에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패닉이었지만, 입대 후 군대 적응 문제과 다시 얽혀 강도가 심해졌었고, 지금까지도 병영생활 상담관을 통해 상담받으며 치료받고 있다. 상담을 진행하던 도중 증상들이 공황장애(panic disorder)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까진 일상생활을 망쳐버릴 정도의 강도는 아니기에, 따로 크게 조치를 취하진 않은 상황. 공황장애보단 패닉이란 말이 가벼운 우리 문화이기에 앞으로 패닉이라 표현하겠다.


패닉은 어렸을 때부터 사후세계에 관해서 생각하다가 찾아왔다. 기억에 남는 계기는, 설날 때 나이 많은 사촌들과 '팬도럼'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영겁의 시간 앞에서 무너진 인간 존엄성을 느낄 때부터였다. 그 당시 그 영화를 본 뒤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중학교 때는 울면서 가족과 함께 새벽 산책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악몽에 시달리는 나를 깨운 것은 아버지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물리학자인 아버지에게 사후세계는 존재하는 거냐고, 신은 있는 거냐고 질문하자 아버지는 질문이 well-defined 되어있지 않아 풀 수가 없다며 다시 내게 신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공포란 감정의 호수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너무나도 nerd 같은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도 이주일에 한번 정도 패닉은 내가 자는 잠자리를 언제나 들렀다 갔다.


유혹에 약하고 본능에 강한 성격인지는 몰라도, 그런 패닉에 제대로 대체하지 못한 나는 몇몇 trigger가 생겼다. 패닉이 오기 직전에 했던 생각, 행동, 감정들은 점차 누적되어, 점점 패닉은 맥락을 잃어가며 나에게 다가왔다. 예컨대, 증상이 한참 심해진 지금은 자기 직전에 숨에만 집중한다는 사실만 인지하여도 패닉이 온다. 체스처럼 패닉과의 수싸움에서 계속 계속 밀리고 있는 지금, 먼 훗날에는 결국 나의 킹이 넘어질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담사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통제하고 조절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말을 했었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는 여태껏 내가 살아오면서 능동적으로 택한 선택이 없다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리(physics)를 시작한 것, 영재고/과고를 준비했던 것, 중학교/대학교 때 연애도, 연세대 의대를 버리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선택했던 것, 동아리를 시작한 것과 그중에서도 팝핀을 택한 것, 2학년 때 양자물리를 당겨들은 것, 동아리 무대를 짜며 고통받은 것. 내 기억 속 강렬했던 선택의 순간을 들여다보면, 동기는 순수함을 잃은 채 허울 좋게 서있기만 하였다.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지를 위해, 스스로 이상적인/동화적인 인격체를 형성하여, 그러한 인격체가 되기 위한/고를 만한 선택지를 골랐었다.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그냥 눈치를 많이 봤다는 말이다. 지조와 절개를 갖춘, 원론을 좋아하며 천재이지만, 적절한 유머와 깊은 공감능력을 갖춘 사람. 그러면서도 도덕적으로도 고민을 많이 하며 그로부터 형성된 젠틀함과 사려 깊음을 가진 사람. 욕심 가득 좋아 보이는 것들로만 가득가득 채워서 만들어낸 북극성이었고 돌멩이는 스스로를 별이라고 자신조차 속여왔던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군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무능력한 개체일 뿐이다. 행복의 기준은 너무나도 높고, 그에 비해 난 너무나도 게으르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며 시행착오 없이 완벽한 걸 바란다. 시행착오가 있어야 함은 인지를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과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것은 별 것 아니라 생각하고, 남을 가진 것만을 부러워한다. 그렇기에 언제나 불만족스러워하고, 기분파인 나는 그에 또 감응되어 금방 무기력해진다. 무기력해진단 건 이제는 마치 패닉이란 절벽 앞에 두 발자국 앞에 선 느낌이다. 그곳에서 자칫 실수하면 절벽 아래로 밀쳐져서, 한참을 떨어져 내려간다.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절벽은 높아지고, 좁아진다. 좁아져가는 내 처형대를 보면서 오늘도 생각한다. 과연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사하기 위해 관물함을 비우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