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시간 기준으로 내일.
우리 부대원들은 생활관 이전을 위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원래는 10년도 넘게 쓴 이 곳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몇몇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느꼈던 상부에서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사실 공감은 안됐지만, 군대란 곳은 대규모 인원의 효율적 관리가 중요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게 우리 부대원들은 연말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나하나 자신의 짐을 싸기 시작한다. 평소에도 자리를 워낙 지저분하게 쓰는 나였기에, '이참에 정리나 하지'라며 긍정적인 면을 보려 애썼다. 그렇게 연 관물함.
관물함을 열자 온통 전 애인의 흔적이 가득했다. 편지, 사진, 선물 받은 텀블러, 스티커, 자석, 같이 샀던 일기장, 펜, 시계, 화장품. 갇혀있던 씁쓸함이 마구 뛰쳐나온 느낌에 당황은커녕 외롭기만 하였다. 군대 내 공부도 어찌 보면 내가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였는데. 물리 자습에 성공하면 내가 평소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7편을 봐주겠다고 약속했었기도 했다. 흔적의 클라이맥스는 선물 받은 책.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군대 안에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재밌게 읽었다 말하자 나에게 선물해줬었다. 책 가장 앞에는 아직도 손글씨로 책의 명문장이 적혀있다. "우리의 사랑이 무사하기를". 아쉽게도 무사하진 못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내가 이별을 그저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거리두기 조정에 따른 휴가의 일부적 허용에도 반갑지 않았던 건 전 사람이 잔뜩 묻은 서울과 집에 돌아가기 싫은 것은 아닐까. 과거를 걸어놓은 거리들을 걸을 때마다 어찌할 줄 모를 거란 두려움에 전역 후 삶 역시 기대가 안 되는 것은 아닐까. 대학, 서울대입구역은 물론 홍대, 신촌, 강남, 가로수길, 연남동 모두 걸려있는 장면들. 평소에는 그렇게 기억을 못 해 면박을 받았으면서, 장면들은 어느새 머릿속에 재생된다. 그만 생각해야지. 패닉이 어느새 두 발자국 전까지 와있다.
전 애인의 흔적 말고도 군생활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이병/일병의 발악들이 있었는데, 참 귀여우면서도 아직까지 이어지지 않았단 사실이 씁쓸하고 '그럼 그렇지'란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열심히 쓰던 일기장도 있었기에 펴보았는데, 이런 여기 안에도 묻어있을 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차마 돌리지 못하고 연 페이지를 읽어보는 나. 아프긴 아팠나 보다. 다른 페이지를 넘겨보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와 관련 있는 것들은 달력부터 시작해서 일기장까지, 나의 군생활이 함께 녹아있던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가슴을 파먹는 일인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 정리해서 군수첩에 끼어놓았다. 그것마저 버려버리면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란 거짓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괜찮아지기"라는 선배의 조언에 마음을 굳게 다잡아 본다. 생활관 이전에 꼭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겠지. 익숙하고 소중했던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란 뻔한 말을 되뇌면서 이뤄질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계획을 세우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