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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Feb 15. 2021

명분은 필요하다

'설득'이 낯선 물리학과

비빌 수 있겠어? 원래 되는 거긴 한데 (선임 이름)도 못 비비고 나갔었거든?

이번 생활관 이전을 겪으며 우리 부대원들 생활이 도마에 올랐었다. 누려왔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뻔했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와 내 맞선임이 병사들을 대표하여 간부들과 이야기를 했었다. 내 삶에 있어서 권리보호를 위해 힘을 쓰고 마음을 썼던 첫 경험이었다. 진실과 참을 논하는 게 익숙했던 나에겐 새로운 영역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이 옳은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착각했었다. 다시 말하면, "충분한 지성을 가진 어떤 관찰자가 보더라도 우리의 삶이 정당하고 맞다."임을 '증명'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증명이란 단어 대신 설득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내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회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제 목소리를 내야 하겠지만, 군대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병사의 생활은 간부의 지시에 큰 영향을 받게 되어있고, '평등'을 중요시하는 사회와 다르게 이곳의 위계질서와 계급 간의 간극은 뚜렷하다. 애초에 병사들이 상관의 지시에 불복종하여 단체행동을 하는 것이 불법이라 규정된 군법에서, 병사들의 권리 구제를 위한 투쟁은 말 그대로 위법행위이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군대란 자국 수호와 전쟁을 언제나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하는 집단이니,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병력의 효율적 관리는 피해 갈 수 없다. 예시로 선택을 위해 모두가 모여야 하는 민주주의는 일부 비효율적인 의사 선택 체제이고, 군대에서 이를 선택하기엔 너무나도 큰 리스크가 있다.


하지만 점차 점차 병사들의 생활이 나아지는 것은, 비단 사회를 의식한 상부의 움직임뿐만이 아닌, 사회 분위기에 변화에 따른 간부들의 납득 가능한 생활/권리 수준이 향상되고, 병사의 권리를 주장하는 병사들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병사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집단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5년 전에 비하여 훨씬 좋은 환경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음이 고마우면서도, 고마움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중이다.


병사들의 권리는 '상관의 승인'하에 발전할 수 있기에, 생활수준의 향상은 대게 '투쟁'의 결과가 아닌 '설득'의 결과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번 설득 과정은 쉽지 않았다. 생각 외로 많은 부분들이 규정에 명시되어있었고, 규정이 공감 안 될지언정 법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규정을 이유삼아 우리가 건의하고 주장하는 항목들에 하나하나 반박하시는 간부님이 많이 미웠지만, 그의 논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저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행위를 넘어 규정대로 처리하는 간부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이겠다.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건 우리만의 생각이라고.


결국 그럴싸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고 시작하는 것. 상대를 굳이 반박하게 만들어 규정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 아닌, 상대를 나의 편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설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백번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이를 위해서는 내 주장이 옳고 틀리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닌, 얼마나 옳아보이게 말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면, 이해적 관계가 얽힌 주장의 참/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난센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 사회였으면, 그저 투쟁만을 했겠지. 내가 맞는데, 왜 너네들은 날 이해해주지 못하냐며 싸우기만 했겠지. 하지만 군대였기에 싸울 수 없었고,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알아야 했으며 그러면서 설득의 본질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틀렸다고 말할 말들을 옳게 치장하고 꾸며 상대방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것. Right or wrong 게임이 아닌, Be on my side 게임이라는 것. 그렇게 물리학과는 세상이 움직이는 이유는 '물리'/'사실'이지만,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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