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좋은그녀 Aug 20. 2023

취미 그게 뭔가요.

먹는 거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요즘 갑자기 저를 참 어렵게 하는 친구가 있는데 남편의 은퇴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은퇴 생각 안 하고 살 수 있나요 그런데 모른 척하고 싶었어요. 전업 주부로 10년을 있었더니 뭘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 건지 내가 언제 돈을 벌었었나 싶을 정도로 작아져 버렸거든요. 애가 어릴 때는 은퇴고 뭐고 하루하루 살기 바쁘니까 그런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7~8년 전부터 남편은 노후를 위해 공부를 좀 하라고 했지만 아니 하루종일 애 보느라 샤워는커녕 양치도 못하고 사는데 저런 말을 하는 남편이 얼마나 야속한지 정말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이제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더 솔직히는 '나는 네가 잘 벌어서 좋았는데' 같은 귀 싸대기 맞을 말들을 해대는 남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때도 이해했는데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어린이집 안 보내고 꼬박 48개월을 하루도 안 떨어지고 키웠거든요. 몸도 마음도 정신도 만신창이가 되었죠.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어서 어디다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아이 핑계로 은퇴를 모른 척할 수 없는 때가 되었어요.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 아니지만 여태 남편 덕에 먹고살았는데 이제는 뭘 해야 되지 않나 싶은 강박도 있고요. 그러다가 먹고사는 문제만이 문제가 아닌데 라는 생각에 뇌가 멈춥니다. 그때가 되면 없는 것은 돈이요 남는 것은 시간일 텐데 취미 부자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 공허함은 뭘로 채우지 라는 생각에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마음이 쿵 하더라고요. 


그나마 글쓰기라도 시작해서 다행인가 싶긴 한데 문제는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한 남편에게는 딱히 취미 랄게 없습니다. 남편의 취미까지 볼 여력이 없었는데 지하동굴까지 생각에 생각을 하고 조금씩 올라오다 보니 그동안 모든 신경세포가 아이에게만 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미안한 마음에 남편을 보니 쉬는 날 집에서 휴대폰만 보더라고요. 이렇게는 안 되겠는데 취미 생활 대체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건가요. 


아버님은 아주 아주 젊었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바둑 마니아 십니다. 요즘도 쉬는 날이면 몇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바둑을 두시고 바둑 방송도 하루 종일 틀고 계세요. 결혼 초기에는 어머님이 아주 달갑지 않은 멘트들을 많이 날리셔서 오히려 남편이 바둑에 관심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요. 


결혼 10년 지나니 어머님께서 아버님의 바둑 사랑을 굉장히 응원하십니다. 어쩌면 아버님이 아직 경제활동 하고 계셔서 일지도요. (물론 어머님도 하십니다.) 회사 분들이랑 주말에 바둑 두시거나 집에서 혼자 컴퓨터로 바둑 두시면 " 저 취미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라는 말씀을 자주 하세요. ( 바둑 좀 둬 보신 분들은 아실 거 같은데 내기바둑으로 인해 집에 빨간딱지 붙고 뭐 그런 일 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머님은 얼마나 바둑이 싫으시겠어요. 그런데 여든을 바라보는 아버님의 바둑 사랑을 일흔의 어머님께서 응원하신다니 인생이 이런 건가 봅니다.)


아이 때문에 티브이시청도 컴퓨터 게임도 다 안된다고 책 보라고 운동하라고 엄청 잔소리했는데요. 남편의 인생도 소중하니까 좋아하는 일에 돈과 시간을 쏟을 수 있게 응원해줘야겠습니다. 

그래야 은퇴가 다가와도 적어도 할 일이 없네 라는 생각은 안 할 거 같거든요. 먹고사는 문제만 걱정해도 충분히 늙을 거 같으니 이제부터 부부가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을 하나둘씩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임경선 작가님이 그러셨거든요.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우선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같은 진리.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 해봐야지'는 마음처럼 안된다는 얘기 아닐까요. 지금부터 조금씩 경험해 보고 재미도 느껴봐야 그때 가서 시도해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부부가 같은 취미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어쩌면 그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하니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남편을 글쓰기로 데려올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제가 암벽등반을 하는 게 빠를지도요.) 

작가의 이전글 알지 못했던 외로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