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를 가능성을 엿보다.
나는 동작하는 메모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고 유튜브를 켰다. 신간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을 내놓은 유시민 작가 영상이 올라왔다.
"박문호 박사님~ 강연하시는 거 보니까, 무슨 인문학은 그냥 과학의 부분집합이라매요. 이건, 과학자의 오만 아니에요!?" 오! 설마, 내가 좋아하는 두 분의 만남을 들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처음으로 '팟빵'이라는 앱을 깔고, 처음으로 유로 팟캐스트를 구매했다. (지금은 유튜브에 풀려있다..) 유치원 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 부산을 가는 동안, 아이가 잘 때 들을 생각이었다.
'유시민X박문호'의 대화는 대략 1시간씩 총 2회가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갈 때 1화를 듣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2화를 들었다. 2화를 듣는 중에 박문호 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작동하는가? 입니다.'" 아! '작동'이라는 한 단어를 듣는 동시에 지난 1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2022년 10월 정도부터 지금까지 나는 '제텔카스텐'이라는 메모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빠져있다. '왜 난 이 짓을 하고 있지?' 내가 생각한 근본적인 이유는, '내 인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라고 생각했다.
평생의 고민 중에 하나는 '능력을 잃지 않는 법을 찾기'였다. 나는 관심사도 잘 변하고, 새로운 관심사가 생길 때마다 파고드는 스타일이다. 그게 인생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공들여서 무언가를 했던 시간들이 날아가 버린 기분이다. 허무하다. 다시 무언가를 하려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싫었다.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제텔카스텐'이 가능하게 해 줄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여기에 몰입했다.
나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회로를 설계하는 일을 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마지막 직장을 나오기까지 내가 가 가장 많이 한 고민은 '왜 안되지?'였다.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10년 동안 '동작시키는 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게 엔지니어로써 내가 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 일을 그만두어도, 고민의 관성은 남아있다. '정상적으로 동작시키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내가 '제텔카스텐'을 만났다.
내 제텔카스텐은, 책 70권을 쓰고 400여 편의 논문을 발행한 니콜라스 루만의 메모상자처럼 동작하지 않았다. 고장 난 것처럼 동작하지 않는 내 메모시스템을 스스로 동작하는 시스템으로 만들고 싶었다. 루만이 자신의 메모상자를 일컫어 '소통의 파트너'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욕구가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 왔다.
내가 다닌 두 번째 회사는 유독 단순한 엑셀 작업이 많았다. 매년 5000억 이상 매출을 하는 작지 않은 회사였지만, 개발 프로세스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여러 회사를 다녀봤지만, 이런 회사는 없었다. 작든 크든 대부분의 제조회사는 회사의 DB와 설계프로그램의 DB와 연동이 되어있다. 설계프로그램에서 설계를 마치면 회사 시스템에 바로 반영되어 원가, 구매, 생산, 제조, 전략 프로세스에 반영된다. 이 회사에서는 설계프로그램으로 설계를 마치고 관련 자료를 엑셀로 만들어 회사 전산에 등록해야 했다.
단순한 업무를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나는 자동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Excel VBA를 처음 시작했다. 그 엑셀 작업은 대략 1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클릭 한 번으로 되도록 만들었다. 클릭 한 번으로 만들기 위해 공부한 시간을 합치면 3박 4일은 보낸 것 같다. 그래도 즐거웠다. 하기 싫은 일 5분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일을 8시간 하는 게 더 좋다.
니콜라스 루만은 연구기간 동안 9만 개의 메모를 만들었다. 그는 70편의 책과 400여 편의 논문을 썼지만, 메모상자와 관련된 에세이는 <Communication with Slip Boxes> 1개뿐이다. 독서와 관련된 에세이 < Learning How to Read>까지 합치면 2개다.
왜, 단 2개의 에세이만 있을까? 나의 추측으로, 메모상자 운영과 활용 방법이 지속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메모상자 운영법에 대해 단정 짓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5천 개의 메모가 있을 때, 1만 개의 메모가 있을 때, 2만 개의 메모가 있을 때 적용되어야 하는 전략은 달랐을 것이다.
루만은 23,000장의 메모 카드를 운용하고 나서, 새로운 방식의 2번째 메모 상자를 구축했다. 자신만의 메모 시스템을 갖추고 싶은 사람은 루만의 두 번째 메모 상자에서 무엇이 변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나름대로 찾은 답은 다음 기회에 정리해 보겠다.
메모상자는 단순한 구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학습에 도움이 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실제로 동작하는 시스템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루만이 단 2개의 에세이만 남긴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루만이 말하길, 동작하는 제텔카스텐을 만들려면 최소한 몇 년은 지나야 한다고 했다. 그가 하루에 6개 정도의 메모를 했다 치고, 1년이면 대략 2000개, 2년이면 대략 4000개, 3년이면 대략 6000개다. 몇 년이라고 했으니 대략 5천 개는 돼야 돌아가는 시스템이 되는 최소 조건을 갖추는 샘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 대해서도 다음 기회에 정리해 보겠다.
동작하는 제텔카스텐을 만들기 위해, 지식관리(PKM)라는 장르를 초월해서 다양한 책을 봤다. 책과 거리가 먼 인생이었던 내가 다양한 책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야 어느 정도 관리가 쪼금 되는 것 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숙성시켜서 내 사고 체계로 편입시킬 수 있는 신뢰할만한 장치가 없었다면,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조금 남은 퍼즐들이 있다. 조금 더 시간을 허비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은 보람되다. 내가 평생 작동 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음 기회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라고 생각하다.
그래서 지금 어느 정도 작동하는가? 몇 달 전 마지막 Obsidian Vault로 정착하면서 대략 2000 정도의 메모가 쌓였다. 고작 2000개의 메모에서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까? 몇 달 전에는 '글쎄?' 였다면, 지금은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