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뇌과학>이라는 책에서 '고유명사는 (나와) 상관관계가 없어서 망각하기 쉽다'고 했다.
해이즐 그레이스 랭커스터..
이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영화 <안녕, 헤이즐>은 나와 상관이 없는 영화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실존하는 배우의 이름도 아니고, 단지 영화 배역의 이름이다.
이 영화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경험들을 선물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산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소설책을 구매한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영원한 사랑'이란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 이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 인생에서 '영원한 사랑'이란 키워드 정의는 이 영화가 결정했다.
한국에는 '안녕, 헤이즐'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원제목은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The Fault In Our Stars)'다. 내가 구매한 책 제목도 동일하다.
영화관에서는 4번, VOD로 3번 정도 본 것 같다. 책도 봤다. 나는 대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는 편이다. '헤이즐 그레이스 랭커스터'라는 고유명사를 기억에 각인할 정도로 보았다. 하지만, 20대의 나는 원제목이 어떤 의미 인지 전혀 몰랐다.
10년이 지났다. 여러 직장도 옮기고, 결혼도 하고, 6살 아이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야,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는 제목이 어떤 뜻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모든 만물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방식으로 존재한다.
장미는 완전한 하나의 꽃으로 생성되는 것이지 먼 미래에 나옴직한 완벽한 꽃이 되기 위해 불완전한 상태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책, 인생의 태도>
우리 별은 잘못을 하고 있다. 폐암에 걸린 17세 소녀 헤이즐, 골암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17세 소년 어거스터스를 존중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잘못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암환자인 헤이즐(17세)과 어거스터스(17세)를 어두운 존재, 아픈 사람, 어린아이로 묘사하지 않는다. 어느 10대와 마찬가지로 밝은 청춘으로 묘사한다. 그 어느 누구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비춰준다. 우주 모든 만물이 그렇듯, 자신들이 있어야 할 방식으로 존재한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영화 속 여정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그들을 '어린 환자', '치료 대상자', '고집스러운 10대', '미숙', '우울한 존재'로 바라본다.
나는 '불쌍하다'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을 가엽게 보는 마음, 불행하다고 보는 마음들은 어디서 비롯될까? 난 이런 '연민'의 마음은 대부분 '사랑'으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불쌍하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자신의 상태를 안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내뱉는 말일뿐이라 생각한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서로 사랑하지만, 가여워하지. 않는다. 어거스터스는 암이 치료되었는지 알았으나, 후에 그 암세포가 다른 신체 부위로 전이되어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에게 '불쌍한 마음'같은 것은 가지지 않는다. '환자', '치료'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인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좋지않은 소식에 마음 아파할 뿐이다. 그 둘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얄팍한 편견으로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한 나를 반성한다. 6살 아들을 '밥 잘 먹고 힘세져야 하는 존재', '잠잘 자고 키 커야 하는 존재', '칭찬스티커를 받아서 선물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렇게 말한 나를 반성해 본다.
무한대의 시간에 감사
사랑하는 자 들아 주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성경, 베드로후서 3:8~9>
초등학교 2학년, 아랫집 소녀가 교회를 가보자고 해서 따라갔다. 교회 선생님은 내가 교회를 가면 100원을 줬다.(100원씩 주는 선생님은 지금까지 살면서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나는 일요일이 되면 교회를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오락실에 들르는 게 코스였다. 그렇게 나의 '나일론 신자' 생활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베드로후서에서 말하는 신의 시간 개념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니?
지금 나에게, 이 말씀을 조금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는 해석 체계는 단 하나만 있다. <안녕, 헤이즐>이 나에게 선물해 줬다.
골암이 완치되었는지 알았던 어거스터스는 암세포가 다양한 신체 부위로 전이되었다. 결국 악화되어 죽는다. 아직도 폐암을 겪고 있는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남겼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수학 이야기를 할게요. 전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물론 0과 2 사이라든지 0과 100만 사이에는 더 '큰'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 줬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날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를 원하고, 아,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책,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다. 하지만, 우리의 순간순간은 '0.815614848123.. 초'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무리수의 연속이다. 우리의 하루는 24시간이지만,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영원이 끝없이 이어지는 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낀 다면, 우리는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천 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 년 같다고 말하는 신의 시간 개념은,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의 중요성을 알려 주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