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담한 도시

파두아

by 루시

아침에 베로나에서 기차를 타고 파두아로 향했다. 거리는 한 시간 남짓, 별로 멀지 않았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인지 베니스나 로마와 달리 공짜 지도를 얻을 수 있어서 그 작은 사실에도 행복했다. 배낭여행족에게는 1유로가 가지는 가치가 크니까. 내가 파두아에 대해 아는 것은 오래된 대학이 있다는 것과 유명한 조토의 그림이 있다는 것뿐이었기에 일단 그림이 있다는 스크로베니 예배당(ScrovegniChapel)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

스크로베니 예배당에는 벽화의 보존을 위해서 30분 간격으로 정해진 인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조토와 성당에 대해 간단한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성당 내부는 작았지만, 천정과 온 벽이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그 독특한 천정의 푸른 색감은 너무나 선명했으며, 푸른 하늘에 빛나는 노란 별들은 천상의 별처럼 반짝대고 있었다. 그림은 사실적이고 생생해서 그림들은 표정이 섬세하게 살아 있었으며, 그림 사이의 대리석 그림은 마치 실제 대리석벽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안쪽 벽에는 최후의 심판 그림이 있었는데,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오른편의 구원받는 자, 왼편에 지옥에 떨어진 자, 그 중간에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성당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는 그림이 있었다.


최후의 심판 맞은편에는 하느님과 수태고지 그림이 있었다, 아치형 통로 위쪽에 하느님이 나이 든 할아버지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이상하다 느끼는 것이지만, 왜 우리는 하느님을 남자로 생각하는 걸까? 교리에서는 하느님은 성별이 없다 하면서 그림은 언제나 남자, 그것도 젊은 남자가 아니라 나이 든 남자 모습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가부장제의 뿌리는 동서양의 구별 없이 깊고도 오래된 듯하다. 하느님 그림 아래로 양 옆으로 한쪽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한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천사의 전언을 듣고 있다. 두 그림을 분리시켜 배치한 것이 신선 했다. 조토의 그림을 보존하기 위한 그들의 방식이 이해가 가면서도 좀 더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야속할 정도로 그림은 아름다웠다.


조토에게 그림을 부탁한 엔리코 스크로베니는 고리대금업자로 그 아버지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또한 고리대금업자였는데, 당시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고리대금업은 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가톨릭 믿음을 가지고 있던 엔리코는 아버지와 함께 자신의 영혼도 구원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는 불국사의 불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죽은 부모의 영혼을 위해, 죽은 아내의 영혼을 위해 사람들 은신 전을 짓고, 교회를 짓고, 절은 짓는다.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사라지면서 그런 신성함에 대한 구원의 열망은 덜 표현되고 있지만, 문화권이 달라도, 시대가 바뀌어도 가족과 자신의 구원을 열망하는 신앙인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파두아 대학 내 조각상과 교수이름 장식물들


파두아 대학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코페르니쿠스가 다녔고, 단테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르쳤던 대학이라 한다. 다른 지역과 달리 교회의 통치를 받지 않았기에 좀 더 자유로운 학풍이 가능했다고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단테가 있던 학교라 생각하니 그 내부를 한걸음 한 걸음 걷는 것조차 신이 났다. 학교 투어를 참석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서 마음을 비우고 이리저리 학교 구경을 했다. 파두아 대학의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건물에는 다양한 방패 모양의 표식이 있었는데, 교수들 이름을 방패에 장식해서 걸은 것이라고 한다. 단테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찾고 싶었으나 너무나 많고 복잡해서 포기했다.


파두아 대학을 나와 성 안토니오 대성당을 향해서 계속 걸었다. 일부러 뒷골목길을 따라 걸었는데, 길 한쪽에서 단테가 살았었다는 표지판도 볼 수 있었고, 미네르바라는 헌 책방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이태리의 오래된 도시답게 중간중간 낡아서 손상된 프레스코화도 군데군데 있었다.



성 안토니오 성당은 이태리의 여느 성당들처럼 크고 아름다웠다. 앞면은 아씨시의 성당들을 연상시키면서도 커다란 돔들이 이어진 독특한 건물이었다. 알고 보니 로마네스크+고딕+비잔틴 양식이 결합된 건물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바오로 성당이 각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성 안토니오 성당은 성 안토니오의 유해를 모시고 있고 있었다. 성 안토니오는 설교를 매우 잘하는 성인으로 해박한 교리 지식과 뛰어난 언변으로 명료하며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30년, 시신을 발굴했는데, 그이 혀만이 마치 생전처럼 썩지 않았다고 한다. 그 혀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성당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성인의 신체 일부를 보존하는 전통이 우리에게는 기괴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 같다. 이태리 어느 박물관에서 순교자의 뼈를 중앙에 넣은 십자가를 본 적도 있었다. 고대에는 식인 풍습이 있던 종족은 죽은 이의 몸을 먹음으로써 그의 능력을 나눠갖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연관시켜 생각해볼 때, 성인의 일부를 몸에 지닌다는 것도 당시에는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그리스도교에도 이러한 주술적 의미의 행위가 생각보다 많다.


2016-05-30 12.55.07.jpg 식물원 신관과 저 멀리 보이는 성 안토니오 성당


안토니오 성당을 나와 세계 최초의 식물원(Orto Botatinco)으로 향했다. 그 오래전 16C에 세계의 식물을 모아놓고 연구했었다니, 괜히 이태리 북부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 게 아니었다. 식물원은 동그란 큰 원안에 중앙에는 작은 분수가 있고 내부에 사각형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각 구획마다 허브, 이태리 자생식물, 약용식물, 수생식물, 관엽식물, 선인장을 비롯한 다육식물 등 다양한 식물들이 분류되어 심어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다육식물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다육식물들이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식물원 외에도 새로 지은 현대적 건물의 식물원도 있는데, 전 세계 지역별 식물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 교육장으로 좋아 보였다.

식물원의 어여쁜 다육식물


식물원 밖을 나오니 동상들에 둘러싸인 광장이 나왔다. 평화로워 보이는 그 광장은 프라토 델라 발레(Prato Della Valle) 광장으로 식물원의 동그랗고 네모난 모양을 본떠서 만든 곳이었다. 각각의 조각에는 파두아의 유명인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표정이 각양각색이었다. 그곳 나무 그늘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약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여행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상념에 잠겼다. 특히 조토의 그림과 관련해서 구원의 빈부격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중세 시대에 누군가는 구원을 희망하며 순례를 하고, 성당을 지어 바치고, 절을 지어 바칠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럴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상황인가. 그래서 나온 게 신교운 동일 터인데, 지금 한국의 일부 개신교에서는 십일조로 사람들의 줄을 세운다. 다시 중세로 돌아간 듯한 그리스도교. 신을 매개로 한 개인들의 욕망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다시 왔던 길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오래된 로마 다리를 건너 과거로의 여행을 마치고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파두아는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였다. 로마나 베니스보다 한적하면서도 로마의 유적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 다리 양 옆으로 베니스의 풍광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세시대의 아름다운 성당과 오래된 대학, 최초의 식물원까지 여유 있게 문화적 유산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을 갖춘 아담한 도시 파두아는 복잡함을 벗어나 이태리를 즐기기에 적격인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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