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엣과 그녀의 흔적들

베로나

by 루시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배경이 된 도시다. 구도심의 브라 광장(Piazza Bra) 한켠,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비는 하트 모양의 조형물은 이 도시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도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곳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던 발코니가 있고, 사랑에 두 번 죽은 줄리엣의 무덤이 있다.


줄리엣 무덤 앞의 셰익스피어 동상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과 발코니는 베로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명소이다. 줄리엣의 가문인 캐플릿 가문 소유의 집으로 13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영화 줄리엣의 편지에는 줄리엣의 발코니 옆에 사람들이 남긴 러브레터에 사랑의 조언을 해주는 줄리엣의 비서들이 나온다. 벽에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낙서들과 포스트잇 쪽지가 붙어있지만, 줄리엣의 비서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낭만보다는 북적임만 있는 곳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찬 자그마한 마당 한편에 발코니가 있고, 그 아래 구릿빛의 줄리엣 동상이 있다. 줄리엣의 동상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녀의 오른쪽 가슴이 반질반질한다.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사람들이 계속 만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리엣의 가슴 만지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발 빠르게 줄리엣 옆에 서야 한다.


줄리엣의 발코니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사실들이 있다. 로미오가 발코니 아래에서 줄리엣은 발코니에 서서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발코니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원작에는 발코니 장면이 없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발코니라는 단어 자체를 알지도 못했다. 발코니라는 단어가 영국에 소개된 것은 1618년, 로미오와 줄리엣이 초연된 지 반세기나 후의 일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발코니 장면이 들어가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원래는 다른 연극에 들어있던 발코니 러브신을 로미오와 줄리엣에 살짝 변형시켜 집어넣었다. 심지어 줄리엣 집의 발코니는 1936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견우직녀 상

베로나 외곽에 나가면 줄리엣의 무덤이 있다. 외곽 작은 성당에 딸린 묘지로 무덤이 있는 성당 입구에는 동양의 로미오와 줄리엣, 견우와 직녀 동상이 있다. 묘지 입구 기록에 의하면, 18세기 말에 활동하던 빅토르 위고도 방문하여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기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줄리엣과 직접적 관계는 없다. 그 묘지가 캐플릿 가문이 쓰던 묘지라고 하여 그곳에 있던 한 소녀의 무덤이 줄리엣의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줄리엣의 집, 발코니, 무덤은 모두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소설 속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존재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집, 발코니, 무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사실처럼 믿고 줄리엣과 관련된 장소들을 방문한다.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한류 열풍 초기에 일본인들이 겨울연가 촬영 장소를 방문하고, <냉정과 열정사이>를 좋아하는 독자가 피렌체 두오모를 방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사람들은 소설, 영화, 드라마 속의 이야기에 열광하며, 실재가 아닌 그 주인공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한다.




처음에는 낭만적이 사랑이야기를 보기 위해 줄리엣의 발코니와 무덤을 방문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조금은 현실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안나의 코멘트로 인해 사실을 대면하게 되었다. 덕분에 줄리엣의 묘지에서 줄리엣의 아픈 사랑을 느껴 눈물을 흘렸다는 다른 이들 같은 느낌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 대신에 허구적 인물들에 열광하고 그들을 실제 존재했던 인물처럼 만드는 우리의 ‘기억함’의 행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누군가가 나를 계속 ‘기억’ 해 준다면 나도 줄리엣처럼 영원을 얻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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