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선배가 없던 나, 롤모델을 외부에서 찾다

감정의 롤모델을 찾아서

by 승연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연구소에 여성 선배는 없었다. 엔지니어링이라는 일터는 원래부터 여성이 많지 않았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타 부서에 몇몇 여성 동료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점심 시간에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였다. 내 고민을 '같은 눈높이'에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외롭고 막막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의 회사 생활 초기, 롤모델은 자연스럽게 남성 선배들이었다. 그분들은 일에 대해 진지했고, 성과 중심적이었으며 감정보다는 논리와 책임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다. 감정을 드러내면 나약해 보일까 봐 억누르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프로'라고 믿었다. 특히 여성이 감정적으로 보이는 것에 더 큰 눈초리가 따르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도 선배들의 인정을 받으며 회사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내 모습이 점점 불편해졌다.

논리로만 일하려고 하다보니, 나 자신의 감정을 자꾸 무시하게 되었고, 마음이 조금씩 메말라갔다. 업무상 억울한 일이 생겨도,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랐다. 감정이 뭔가 불편했는데, 그게 이상한 건지, 내가 민감한 건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리더쉽 교육중 하나인 '코칭'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다른 회사의 여성 선배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그녀들도 감정 때문에 흔들릴 때가 있었고, 억울하고 힘든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기보다는 마주하고, 조율해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사 생활을 이어온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조금씩 내 감정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느끼는 여성으로서의 감정들 -억울함, 불안함, 외로움, 그리고 말한마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내 모습들, 그 모든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내가 왜 불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무조건 참지 않는다. 내 감정이 어떤지를 먼저 들여다보고, 필요하면 말을 꺼낼 용기도 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이 있다는 이유로 내가 더 약하거나 덜 유능한 것이 아니다'라는 걸 믿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여성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회사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 하지말고, 바깥에서 너의 언니들을 찾아봐."

외부의 여성 네트워크는 내게 정말 큰 자산이 되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언니들과의 대화는 내 시야를 넓혀주었고, 내 방식대로 회사생활을 해도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꼭 우리 회사 선배가 아니어도 괜찮아. 너를 조금 더 이해해줄 언니들이, 회사 밖에도 있어."

우리는 꼭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 후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 같다.

"선배 덕분에 저도 제 방식대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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