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심은 없다.

by 박나은

한 차례 취객들이 휩쓸고 지나간 술집 안은 야장에서나 쓸 법한 플라스틱 접이식 테이블과 간이의자가 어지러이 널부려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증정으로 받은 듯 금색으로 새겨진 글씨가 어렴풋이 남아있는 낡은 괘종시계는 어느새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말이라면 값싼 술과 안주를 찾아 2차, 3차를 오는 손님들로 분주할 시간이지만 평일인 오늘은 슬슬 파장의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벽면 티브이 아래쪽에 자리 잡은 남자 하나, 여자 하나의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 위 하얀색 멜라민 접시에는 케첩자국과 몇 개의 파조각이 남아 그곳에 있던 것이 계란말이였음을 유추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어묵탕의 흔적이라곤 약간의 멀건 국물과 양파 조각만이 전부인 뚝배기를 괜스레 숟가락으로 긁던 남자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질문했다.

“인간에게 자비심이란 게 있을까?”


남자는 소주병을 들어 남은양을 체크하듯 병을 눈높이까지 들어보고는, 자신의 잔은 반을 채우고, 남은 술은 상대의 잔에 모두 털어 넣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해 전부 쏟아부은 상대방의 잔은 막상 채우고 보니 건드리면 금세 넘칠 듯 찰랑거렸다.

“자비?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을 말하는 거야?”

여자는 가득 찬 자신의 잔을 보며 인상을 쓰던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낡은 티브이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사람은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랄까. 가만 이게 사전적 의미가 어떻게 되지?”

남자는 살짝 오른 취기를 쫓아보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자비심…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불교용어 맞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비란 게 내가 상대보다 더 나은 처지라고 여길 때 드는 감정 아닌가? 조금 오만하지 않아?”

여자는 나무 대접에 몇 개 남지 않은 서비스 과자 중 하나를 집어 입안에 털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저딴 게 자비심이라면 죄다 없어지면 좋을 텐데.”

남자는 그제야 여자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TV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며칠째 인터넷 포털 상단을 차지하고 있던 음주운전 사고의 용의자가 조사를 마친 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서를 나오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심신 미약? 그딴 거야 말로 가장 쓸데없는 자비심 아닐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차라리 예전 함무라비 법전이야 말로 제대로 된 정의구현이지.”

남자는 자신이 말하려던 자비심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가 무언가에 꽂히면 어떤 얘기를 해도 결국 그 자리로 돌아올 것이란 걸. 만약 자신이 세기말이 뭐냐고 물었다면 지금 저 장면이야 말로 세기말이 아니겠냐며 열을 올렸겠지.

한 마디를 더 보태어 또 다른 논쟁을 시작하고 싶지 않기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만큼은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심신 미약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만으로 살인이라는 중범죄가 저렇게 가벼운 것이 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여자는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고 작정한 듯 남자를 채근했다.

“글쎄……”

남자는 팔짱을 끼며 머리를 굴렸다. 술로 헝클어진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돈해 보려 애쓰며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른 거지만, 저런 경우라면 무조건 엄벌에 처하는 게 맞지.”

여자는 TV에서 눈을 돌려 남자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상황에 따라? 그럼 용서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야?”

“아니. 내가 말한 경우란게…뭐 예를 들자면… 한 번도 술을 먹어본 경험이 없는 대학 새내기가 신입생 OT에서 선배들의 강요에 못 이겨 만취가 돼버렸다 쳐. 그러다 운 나쁘게 어떤 사건사고에 휘말렸는데… 그 한 번의 실수로 빨간 줄이 그어져 남은 평생을 범죄자로 살아야 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냐. 이런 상상을 해본 거지. 저 음주운전 상황과는 완전 다른 얘기지.”

남자는 초조한 표정을 드러내며 턱으로 티브이 화면을 가리켰다.

“그런 경우도 마찬가지지. 그 학생이 휘말린 사건사고란 게 음주운전이라면?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면? 앞날이 창창한 학생이 술 먹고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앞날이 창창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도 되는 건 아니잖아. 이건 그냥 무조건이야. 무조건 엄벌에 처해야 해. 나는 사형제도가 왜 없어진 건지 이해가 안 돼.”

남자는 머릿속 가득 사형수의 인권이니 억울한 누명을 썼다가 뒤늦게 석방된 피해자에 대한 사례들이 맴돌았지만 어떤 것도 입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정말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침묵에 여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자신의 잔에 가득 담긴 술을 한 번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입 꾹 닫고 있지? 말 안 해도 뻔하지. 나 이제 갈래.”

남자는 허둥대며 여자의 셔츠 소매 끝을 붙잡았다.

“아직 막차시간까지 여유 있잖아? 한 병 더 안 하고?”

“잠깐 밥 먹재서 나왔다가 벌써 이 시간이잖아. 나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

여자는 옆 의자에 구기듯 접어둔 코트를 집어 들어 바깥으로 쌩하니 나가버렸다.

남자는 물끄러미 자신의 잔에 남은 절반 가량의 소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에게 조금의 자비심이라도 있었다면, 적어도 이 잔을 마저 비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을까.

씁쓸한 마음으로 남은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남자는 코트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