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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율 Jan 08. 2019

마음이 복잡한 날은 맛있는 것과 폭신한 것

루시키의 지하다방

그런 날이 있다. 


내 마음이 무겁고 복잡한데

누군가를 만나 털어놓는 것조차 버겁고 무언가 더 생각하기도 힘든 날. 

좋아하는 찬 술을 마셔도 달지 않고 비릿할 것 같은 날. 


그럴 때는 평소 아끼느라 넣어두었던 깨끗하고 폭신한 손님용 이불을 꺼내 방 한 구석에 쌓아두고

베란다의 귤 상자에서 하루에 세 개만 먹기로 스스로 다짐한 귤을 

후드 주머니에 다람쥐처럼 잔뜩 넣어와서는,

이불에 푹 파묻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까서 나에게 먹인다.


귤을 하나하나 까는 동안도

귤을 한알 한 알 떼어먹는 동안도 아무런 생각 하지 않고

주머니가 가득 빌 때까지 

맛있고 상큼한 것, 폭신하고 따뜻한 것에 싸여 머리를 비우는 이 의식이

술이나 향락적인 것보다 더 잘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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