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키의 지하다방
그런 날이 있다.
내 마음이 무겁고 복잡한데
누군가를 만나 털어놓는 것조차 버겁고 무언가 더 생각하기도 힘든 날.
좋아하는 찬 술을 마셔도 달지 않고 비릿할 것 같은 날.
그럴 때는 평소 아끼느라 넣어두었던 깨끗하고 폭신한 손님용 이불을 꺼내 방 한 구석에 쌓아두고
베란다의 귤 상자에서 하루에 세 개만 먹기로 스스로 다짐한 귤을
후드 주머니에 다람쥐처럼 잔뜩 넣어와서는,
이불에 푹 파묻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까서 나에게 먹인다.
귤을 하나하나 까는 동안도
귤을 한알 한 알 떼어먹는 동안도 아무런 생각 하지 않고
주머니가 가득 빌 때까지
맛있고 상큼한 것, 폭신하고 따뜻한 것에 싸여 머리를 비우는 이 의식이
술이나 향락적인 것보다 더 잘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