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는 일은 안 하고 회사에서 쓴 잡문
요즘 회사에서 외부로 전화거는 일을 하고 있다. 하기 싫어하는 일이야 많지만, 전화는 그중에서도 진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싫은 일이다. 처음 회사에 들어와서 맛보기(?) 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는데, 연말 퍼포먼스 평가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로 콜드 콜링(cold calling, 전화로 하는 영업활동)을 꼽을 정도였다. 영업직은 다들 어떻게 하시는 건가. 대단하다.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거절 내지는 거부당하는 느낌이라서 정말 힘들었다. 작은 회사이다 보니 내가 영업까지 담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 학을 떼며 질색해서인지 나중에 나의 보스 R은 영업 담당 직원을 따로 뽑았더랬다. 하하.
아,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어쨌든 영업 비슷한 전화를 하느라 어느 중공업 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대표번호로 걸었는데, 웬 아저씨가 받는 것이었다. 보통은 젊은 여직원이 받기 마련이라 잠시 당황했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그랬고, 나도 거기에 익숙해졌나 보다. 아니면 80년대생이라 슬슬 꼰대력이 상승하는 것일지도.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당겨 받았을 수도 있지. 아무렴. 그분은 담당부서로 넘겨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직원이 대뜸 외쳤다.
"네, 대표님!"
"어, 예? 아, 저 대표번호에서 전화를 이쪽으로 돌려주셨는데요."
"네?... 아, 그러셨구나. 네, XX 파트 OOO 대리입니다. 말씀하세요."
내가 모르는 사이 대표번호의 의미가 바뀌었나. 대표번호가 정말 '회사 대표가 쓰는 번호'가 된 건가. 나는 대체 어디로 전화를 했단 말인가. 아니, 나는 홈페이지에 나온 번호대로 걸었을 뿐인데. 어째서 그 업체 사장님이 받아서 나에게 직원 연결을 해줬단 말인가. 사장님이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직원은 또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혼자 정리하면서 낄낄거렸다. 회사 대표가 받는 대표번호. 참신한걸?
전화를 하다 보면 늘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받는다. 이름을 대면 아는 대기업들은 안내데스크 직원이 버티고 있어서 이들을 통과해야 내부 직원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규모가 작은 회사들은 그나마 회사 직원 중 하나가 받긴 하지만, 늘 누굴 연결해줘야 하나 고민하곤 한다. 문득 대표번호는 회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한 업무만 도맡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물론 나도 다 안다. 회사를 잘 알려면 어느 정도 짬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런 사람일수록 중대한 일을 많이 한다는 것쯤은. 그리고 그들이 시시한 외부 전화들을 상대할 만큼 여유 있지 않다는 것도.
그냥, 일주일 가까이 전화통만 붙들고 있었다 보니 별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가장 바깥에서부터 점차 누군가를 향해 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사람이 사람 만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추상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데,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가 닿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전화기를 통해 들었던 무수한 목소리들을 떠올려봤다. 그러다 나를 가로막았던 철통 같은 안내데스크 직원들의 솔 톤(tone)이 기억났다. 대표번호로 걸려오는 외부전화가 별로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게 문전박대당할 일인가. 뜬금없이 약간 섭섭해졌다. 어쨌든 나는 친절히 받아야겠군.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잡생각의 고리를 끊은 건 때마침 울린 사무실 전화였다. 전화는 거는 것도 받는 것도 싫지만, 여기서 전화받을 사람은 나뿐이니 별 수 있나. 큼큼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입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법인대출 저렴하게 이용해보시라고 연락드렸는데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