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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May 15. 2021

위층 어딘가의 이웃에게

올해도 베란다 피크닉을 하시나 봅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도 1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렇게 다시 펜을 잡아볼 줄 몰랐네요. 아날로그 감성을 깨워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요. 저는 편지 쓰기를 썩 좋아하는 편이고, 또 이왕 시작한 거 계속해보겠습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풀렸지요. 완연한 봄을 넘어 오히려 덥기까지 합니다. 사무실에 앉아있노라면 이 계절이 지나기 전에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하지만 코로나로 바깥활동도 여의치 않으니 당신처럼 집안에서 기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어떻게 아느냐고요? 작년부터 쭉, 저는 당신의 은밀한 피크닉을 지켜봐 왔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저는 베란다 쪽 하늘만 보고도 계절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을에는 사과 껍질이, 겨울에는 고구마 껍질이 날아들었거든요. 과일의 제철을 잘 몰랐는데 한 2년쯤 되니 좀 감이 옵니다. 한 번은 키위 껍질이 실외기에 붙은 걸 보고 키위를 사 먹었는데 과연, 맛있더군요.


어제는 흩뿌려지는 사과 껍질을 봤습니다. 알맹이를 다 빼앗긴 사과가 불쌍했는지 하늘이라도 마음껏 날길 바라셨나 봐요. 하지만 당신의 바람과 달리 사과껍질은 멀리 가지 못했어요. 저희 집으로 추락하고 말았거든요. 몇 층이나 여행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슬프게도, 아무튼 그렇습니다. 혹시 궁금하실까 봐서요.


관리실에 말해서 혹시 놀라셨을지 모르겠네요. 그저 작년부터 당신이 먹은 제철 열매 이야기와 누구신지 너무 궁금해서 CCTV 달아서라도 뵙고 싶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송이 나와서 저도 조금 놀랐답니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저를 만나고 싶지 않으시다면 쓰레기를  이상 날리지 않는 것으로 암호를 정해보죠.


제가 출퇴근하는 직장인이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거의 늘 집에 사람이 있거든요. 보내시는 신호를 놓치지 않도록 두 눈 크게 뜨고 있으라 당부하겠습니다. 물론 저 또한 주말에도 쉬지 않고 주시하고 있을 예정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이 아파트에 산지도 벌써 3년은 더 되었네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랫집에는 누가 사는지 압니다. 하루도 빼지 않고 밤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시는데, 이웃으로서 그분의 건강이 염려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안부인사 차 뵌 적이 있습니다. 당신도 위층인지 그보다 더 위층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인지 궁금한 게 참 많지만 어쨌든 얌전히 기다려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지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이웃, 9xx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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