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것은 얼마나 슬픈가요
저는 주말에 종종 혼자 전시를 보러 다닙니다. 한 달에 한번, 전시회 목록을 만들 정도로 꽤 진심인 편이지요. 서울에 살아서 좋은 점들 중 하나는 전시 볼 곳이 정말 많다는 거예요. 흔히 알려진 예술의 전당이나 '미술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들 말고 갤러리도 많습니다. 예전에는 갤러리가 작품을 파는 곳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서 그냥 보고 나와도 된다고 하더군요. 작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보다 아마 저처럼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말은 이틀뿐이다 보니 하루에 서너 개 정도 비슷한 동네의 갤러리들을 한꺼번에 방문하곤 하는데, 한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후 4시 무렵, 마지막 방문지에 도착한 저는 완전히 진이 빠졌습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요. 하지만 힘들게 온 동네였고, 전시 장소도 작품도 꼭 보고 싶었던 터라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개관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미술계의 큰 손이 아시아에 연 첫 갤러리였거든요. 얼른 보고 집에 가자고 결심한 저는 관람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전시를 다 본 모양인지 제가 있던 입구 쪽으로 걸어오더군요.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 이름이 들리기 전까지는요.
"-- 남준 씨가 --"
혹시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지만, 그들이 제게서 불과 1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채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들은 겁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먼저 거기 서 있었다니까요? 눈이 저절로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그 방탄소년단 RM이요? 진짜요? 제가 아미는 아니지만, 방탄소년단 솔직히 멋있지 않습니까.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훤칠한 남자분이 서 있었습니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사실, 이름이 들리기 전부터 신경이 쓰이긴 했습니다. 분명히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친구들 중에 저렇게 키 큰 사람은 없어서 끙끙대던 참이었는데 속이 시원했습니다.
연예인을 눈앞에서 본 건 오랜만이었답니다. 저는 신기하고 들떠서 친구들에게 RM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이야기를 할수록 더 우울해지는 게 아니겠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라 명명할 수 없는 관계, 일방적인 관심 뭐 그런 것들을 말이지요. 제가 팬이었다면 분명 즐겁고 기뻤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팬이 아니고, 친구는 더더욱 아니고, 어떤 접점도 없는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부를 이름이 없는 관계는 반가워할 '핑계'조차 없다고 해야 할까요. 도대체 뭐가 반갑고, 왜 반가운 걸까요? 나는 상대방을 아는데 상대방은 나를 모른다는 것도 쓸쓸한 일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불쑥 인사하는 건 무례한 일이고, 때로는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얼굴을 안다고 그 사람을 아는 게 아닌데, 인사를 할 이유는 사실 없습니다. 참, 이래저래 씁쓸하더군요. 하지만 이게 꼭 별처럼 먼 존재들에게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관계는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가끔은 도망치고 싶습니다. 나만 마음 쓰나? 나만 좋아하나? 나만 '우리'가 소중한가? 그런 의문을 가지게 하는 관계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높은 확률로 있을 테지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사람,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사람,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섭섭하고 외롭고 허무하고 쓸쓸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지요. 나 또한 분명 누군가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얼마나 가련한지.
그리고 새로 이름을 붙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떠올려보았어요. 친구라고 부르는 순간, 애인이라고 부르는 순간은 얼마나 반짝이는지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나면 두 번 다시 그 전으로 못 돌아갈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아마 팬클럽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고 보니 김춘수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고요.(<꽃> 중에서) 어쩌면 저도 RM에게 '무엇'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내적 친밀감 때문에 순간적으로 인사할 뻔했습니다) 가만, 그럼 팬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고민해봐야겠군요.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