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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적루씨 Nov 03. 2021

아무튼, 김치찌개

[글 모사] 음식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적어오라고 숙제를 내줬다. 

무엇을 적어낼까 고민하다 '김치찌개'를 적어냈다. 


반 친구 중에 한식을 적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반 친구들은 피자, 햄버거, 치킨, 짜장면 등을 적어냈다. 각종 외국 음식에 둘러싸여 존재감 없이 있는 '김치찌개'라는 글자가 뭔가 외로워 보였다. 친구들은 그 후로 나를 김치찌개 좋아하는 아이로 기억했다. 


그때부터였을까? 

김치찌개가 나의 소울푸드로 자리 잡은 건.


나는 자라면서 무수히 많은 김치찌개를 먹었다. 

족히 천 그릇은 넘게 먹은 것 같다. 한국의 식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음식. 반찬이 없을 때 끓이면 밥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는 음식. 




김치찌개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참치를 넣어 고소하게 끓여낸 참치 김치찌개. 김치와 양파만 넣고 달짝지근하게 끓여낸 김치찌개.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끓여낸 돼지고기 김치찌개.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돼지고기 김치찌개이다. 흔히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이면 고기에서 육수가 우러나오기 때문에 따로 육수를 내어 끓이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김치찌개는 다르다. ‘찌개의 생명은 멸치육수!’라는 신념으로 멸치로 우려낸 육수에 숭덩숭덩 썰어낸 돼지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다. 김치도 많이 넣고, 김칫국물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엄마가 진하게 끓여낸 김치찌개를 먹으며 나는 커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30살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냈다. 

첫 직장에서 여행 콘텐츠 기자로 일하면서 2~3개월에 한 번씩 외국으로 출장을 갔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정도. 그리고 남은 이십 대를 일본에서 보냈다.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리고 일본에 살다가 가끔 한국에 올 때 입국장에 도착하면 꼭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나 공항에 도착했어. 김치찌개 알지?"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길. 머릿속에는 보글보글 찌개 소리가 들린다. 몽글몽글 김이 피어오른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김치찌개와 갓 지은 밥 한 그릇을 내어준다. 나는 말없이 허겁지겁 밥 두 그릇을 비우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연다.


"이제야 집에 온 것 같네!"




일본에서 보낼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외로움과 싸우는 일이었다. 

직장에서 바쁘게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혼자 밥을 먹을 때 문득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올라왔다. 그때마다 나는 한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일본에도 김치가 있지만, 그것은 한국의 김치와 다르다. 그건 그냥 ‘기무치’다. 말 그대로 배추를 양념에 무친 것에 불과하다. 따로 숙성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본의 기무치는 깊은 맛이 없다. 배추와 양념이 따로 놀고 김치의 톡톡 쏘는 맛이 없어 밍밍하기 그지없다. 엄마의 김치찌개를 따라서 만들어봤지만 밍밍한 김치로는 엄마의 깊은 맛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외로울 때면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일본에 김치가 있어 다행이야’라는 생각으로.




요즘도 힘이 들 때나, 외로울 때 그리고 마음이 헛헛할 때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다. 

그러면 어느새 마음이 진정되고 편안해진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추억이 가득 담긴 '소울푸드'가 있을 것이다. 나의 소울푸드는 김치찌개이고, 김치찌개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나는 아마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김치찌개 한 숟가락 먹고 죽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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