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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적루씨 Dec 31. 2021

나의 39살 안녕, 고마웠어

[글,책_겨울] 네번째 이야기



"오늘 잠을 자면 눈썹이 새하얗게 변한단다."


어렸을 때 아빠는 매년 12월 31일에 언니와 나에게 겁을 주며 말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12월 31일에 졸린 눈을 비비며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눈썹이 하얗게 변하면 어떡하지?' 매년 걱정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지만, 눈썹이 하얗게 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눈썹을 걱정하며 매년 마지막 날을 보내곤 했다. 평소 말이 없는 과묵한 아빠는 이날만큼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곤 했다. 유난히 즐거워 보였던 아빠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12월 31일이라는 마법의 날은 아빠도 변하게 하는 날이었다. 아빠는 아마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올랐던 것 같다.


매년 마지막 날,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 계획을 세운다. 나에게 올해는 더 특별하게 다가왔는데, 내년이면 마흔이기 때문이다. 30대의 마지막 해를 알차게 보고 싶었고,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을 잘 쓰려고 노력한 한 해였다. 흔히 나이의 마지막 자릿수가 9로 끝나면 '아홉수'라고 해서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올해는 안 좋은 일보다 좋은 일이 많았던 한 해였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했던 일을 적어보는데 참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고맙고, 가족에게 고맙고 모두에게 고마운 한 해이다. 






올해는 내 삶에 큰 변화들이 많았다.

가장 큰 변화는 이직과 아이의 어린이집을 옮긴 것이었다.


이직을 결심한 건 작년 말부터였다. 이제 내년이면 40. 더 늦기 전에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회사에 오래 다니면서 익숙해진 근무환경 탓인지, 업무에 긴장감이 없었고 항상 느슨한 마음뿐이었다. 무엇보다 일이 재미없었고, 나의 하루의 1/3을 차지하는 회사생활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익숙해서 좋은 점도 많았다. 크게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해도 되었고, 일의 속도도 빨랐다. 인생의 가장 큰 모토가 '재미'와 '도전'인 나에게 재미와 도전 두 가지가 모두 없어진 회사는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회사에 지원해 합격하였고 이직을 하였다.


새롭게 옮긴 회사는 풀 재택근무에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회사이다. 한 달에 정해진 근무시간만 채우면 되고, 일하다가도 볼 일이 있으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 덕분에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등원시키고 집에 와서 일을 시작했다. 회의가 없으면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기도 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어머니, 휴직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밖에서 프리랜서, 백수로 오해받는 게 일상인데, 나 또한 그런 오해를 자주 받는다. 


컴퓨터를 켜면 출근, 끄면 퇴근. 매일 출퇴근 시간을 길에서 보내지 않아서 좋고,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아이도 나도 모두 만족스럽다. 특히 재택근무로 옷이나 신발을 사는 비용이 확 줄었다. 물론, 그 비용들이 배달비도 모두 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하는 일은 이전 회사와 비슷하지만, 외국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는 회사라 모든 의사소통을 영어로 한다. 내 영어 공부의 강력한 동기부여가 생겨서 덕분에 영어 공부도 이전보다 열심히 하게 되었다.


내가 이직하고 얼마 후, 아이도 어린이집을 옮겼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어린이집을 한동안 가지 않았는데, 그 영향인지 좀처럼 어린이집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어린이집에 가더라도 점심만 먹고 왔다. 10시 등원. 12시 30분 하원. 하원 후에는 엄마가 아이를 돌봐주었는데, 4살의 혈기왕성한 아이의 체력을 엄마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대기로 등록해둔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마침 아는 언니의 아이들이 그곳에 다니는 터라 물어봤더니 만족한다고 하여 바로 옮겼다. 아이의 어린이집을 옮긴 건 신의 한 수였다. 새로 옮긴 어린이집은 유난히 야외활동이 많고 각종 이벤트도 많은데, 항상 새로운 활동을 해서 그런지 아이는 어린이집에 재미를 붙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린이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가 되었다. 휴, 이제 엄마도 조금 쉬게 되고 나도 아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많이 이룬 해였다. 책을 출판해보기도 하고, 그동안 되고 싶었던 브런치 작가도 도전하여 한 번에 합격했다. '미라클모닝'을 어느 해보다 많이 한 해이고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운 한 해이기도 했다. 매년 독서 100권을 목표로 잡는데 비록 달성은 못 했지만 80권 가까이 읽었다. 영어 공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했는데, 이 일은 나에게 작은 성공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었다. 올해는 무엇보다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며 매일의 작은 시간이 모여 큰 시간이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한 해이기도 했다. 


이런 나의 작은 성공들이 내 마음 속에 씨앗을 뿌려 크게 자랄 것이라 믿는다.

비록 오늘 잠을 자도 내 눈썹은 새하얗게 되지 않겠지만, 

유난히 신나 보였던 아빠처럼 나도 내년이 기대되고 신난다.



나의 39살 안녕.

40살에게 인수인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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