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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게임을 운영하며

그렇게 나는 사업 PM이 되었다 #2

by 박루디

지난 글과 이어집니다. 차례로 봐주시면 좋겠지만, 지 않으셔도 이해에 지장은 없습니다.



첫 직장


여느 때처럼 피시방에서 레이드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영 파티가 구해지지 않았다. 시간이 뜨자 마음 한 구석에 치워두었던 부채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느릿느릿 구직 사이트를 열었다. 대학 생활을 타에 모범이 될 만큼 성실하게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성실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취업 시장은 살얼음판을 방불케 했고 승부를 걸어 볼만한 곳이 좀처럼 보이지 않더라.


그렇게 좌절하던 중 한 게임 회사의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유저가 게임을 더욱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게임 개발과 운영에 이르는 여정에 함께할 GM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흥미가 동하던 차에 한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유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합니다."


누군가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일, 그 추억이 가슴 깊은 곳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 이야말로 내가 오랜 시간 꿈꾸던 게 아니었던가. 떨어지더라도 부딪혀봐야 후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회사가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역량은 회사의 비전이나 게임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으나, 해당 공고에서는 '게임 이해도'와 '글쓰기 능력'을 중점적으로 보는 듯했다. 공지 작성, 댓글 응대, 문의 답변, 동향 전달, 문제 상황 전파 등 GM의 업무 중에는 게임에 대한 사항을 글로 옮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겐 몇 가지 무기가 있었다.

먼저 나는 자타공인 오타쿠였다. 예컨대 공고를 낸 회사가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 중 하나에서는 최고 레벨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제작하는 데 몇 주나 걸리는 장비를 보유 중이기도 했다.

또 게임을 플레이하며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그 게임에서 유난히 재미있던 부분과 아쉬웠던 부분을 소상히 기록한 블로그가 있었다. 이웃이 100명을 훌쩍 넘었으니 적어도 영 못 읽을 글을 쓰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울러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기 때문에 시청각 콘텐츠로 게임 가이드와 같은 즐길거리를 생산해 낼 수 있었고 이 점을 내세워봄직 했다.

나는 밤을 꼴딱 지새우며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무기들을 그러모아 문서 하나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운영 직군 지원 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대뜸 포트폴리오를 들이밀었고 이러한 행동이 열정 있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덕분에 나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 번째는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시간을 들여 파보자는 것이다. 사람에 버릴 사람 없고 물건에 버릴 물건 없다는 말처럼 그 시도들이 빛을 발할 때가 온다.

두 번째는 노력만큼이나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하거나 더 뾰족하게 갈고닦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만남 그리고 이별


입사 후 가장 먼저 맡은 업무는 고객센터로 접수된 문의에 답변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게임 속에 진짜 사람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게임의 계관이나 캐릭터에 대한 질문부터 건의, 버그 제보까지 주제와 문체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게임을 향한 애정만큼은 똑 닮은 문의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통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들의 열렬한 응원, 따끔한 질책과 마주하는 동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직업으로 이 게임을 대하고 있지만, 이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 게임을 좋아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 마음이 커질수록 유저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마치 택배 현황처럼 문의 처리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제안했고 이를 실제로 도입할 수 있었다.

또 유저가 실수로 상점에 아이템을 팔았을 때 복구를 요청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PC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구매' 시스템을 추가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비록 서버 부담으로 인해 이 기능은 채택되지 않았지만,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 경험 자체가 움이 되었다.

이때 깨달았다. "대충 이런 기능이 필요하지 않겠어요?"라고 막연하게 이야기해서는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목적, 기대 효과, 예상 비용, 상세 설명, 화면 제안, 예외 처리, 참고 자료까지 고려한 기획이 뒷받침되어야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일 대 일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보다 많은 유저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도 맡게 되었다. 패치 노트, 이벤트 안내, 업데이트 예고 등을 통해 유저들과 소통하는 일이었다.

게임 운영에 대한 불만이 원색적인 비난으로 돌아올 때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하기도 했지만, 유저들과 좋은 기억을 만들어가는 일이 즐거웠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하면 앞서 재구매 시스템을 제시하며 얻었던 교훈을 활용해 흥미로운 결과를 이끌어냈던 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때 내가 담당하던 게임은 여러 캐릭터를 모으고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장르인 수집형 RPG였다. 수집형 RPG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성능이다. 캐릭터가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소위 '사기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 너도 나도 그 캐릭터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난다. 동시에 능력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캐릭터, 스킬이 유행에 맞지 않는 캐릭터는 소외된다. 모든 캐릭터가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순 없다. 왜냐하면 게임이 서비스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유저에게 새로운 캐릭터, 콘텐츠, 시스템으로 신선함을 주고 지속적으로 매출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현실적으로 유저가 모든 캐릭터를 골고루 얻고 키우게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에게만 이목이 쏠리는 현상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뽑기에서 원하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을 때에서 오는 박탈감이 줄어드는 동시에 뽑기에 대한 만족감이 커지지 않을까? 나아가 비주류 캐릭터를 활용한 재미있는 조합이 등장하여 게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나는 '캐릭터 인터뷰' 시리즈를 기획했다. 캐릭터 인터뷰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처럼 가상의 캐릭터와 담소를 나누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공식 커뮤니티 간행물이었다. 스쳐가는 캐릭터에게 고유한 이야기를 부여해 게임에 깊이를 더하고 유저의 몰입을 돕는 것이 캐릭터 인터뷰의 목표였다. 기대 대로라면 유저는 캐릭터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성장과 활용에 매진하게 될 것이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개발 공수 없이 시나리오 기획자, 매스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약간의 품만 들여도 제작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거창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제안 즉시 시작된 이 시리즈는 유저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저들은 인터뷰에 실린 캐릭터의 활용법을 연구하여 기획자나 개발자조차 예측하지 못한 유행을 선도하거나, 캐릭터를 소재로 한 재치 있는 2차 창작물을 만들어냈다. 그 2차 창작물이 공식 커뮤니티 외부에서 소소한 주목을 받으며 신규, 복귀 유저가 유입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블루 아카이브, 원신처럼 캐릭터에 애틋한 서사를 입히고 유저 또는 잠재 유저로 하여금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게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유저가 바라는 바를 포착하고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유저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한 수요를 감지하고 만들어내는 것 역시 가치 있겠다는 생각을 한층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약 1년 반 뒤, 게임이 서비스 종료를 맞이하면서 정든 유저들과 이별해야 했다.

그동안의 고마움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손 편지를 썼다. GM 아유다는 여러분 덕분에 사회인으로서의 첫발을 무사히 떼었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고.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그리고 화장실에 숨어 한참 울었다.

무언가를 바라며 쓴 편지는 아니었지만, 유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다른 게임에서 꼭 만나자", "다음 게임을 맡게 되거든 아유다의 A, U, D가 들어간 닉네임을 써라. 반드시 알아보겠다" 같은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나는 야생의 땅: 듀랑고 즉, Durango: Wild Lands의 담당자가 되었다.



잿빛 빌딩 숲에서 푸른 정글로 보내는


듀랑고에서는 페이스북과 아카이브 관리를 맡았다. 당시 공식 커뮤니티는 별도 홈페이지나 네이버 카페인 경우가 많았는데 페이스북이 주요 소통 창구라는 점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다 페이스북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채널인 만큼 유저와 보다 친근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임 속 공룡 인형을 활용한 가상의 화자 '콤피'를 구상했다.


콤피는 게임과 인연이 있으면서도 이야기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내러티브를 해치지 않는 화자였다. ⓒ 넥슨


서비스 초반 서버 불안과 병목 현상으로 인해 게임 접속이 지연되거나 가능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마다 솜과 헝겊으로 이루어진 주제에 울음이라도 터진 양 두 눈에 두루마리 휴지 조각을 붙이고 나타난 콤피가 거듭 사과를 전했다. 유저들은 게임을 할 수 없어 화가 나면서도 캐릭터만큼은 미워하기 어렵다며 웃어주었다.

콤피는 컬트적인 인기에 힘입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실물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상상 속 캐릭터가 현실에서 유저들의 품에 안기는 경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울림을 주었다.


동그란 이빨, 솜방망이 같은 발 등 특유의 하찮고 귀여운 이미지가 잘 구현되었다. ⓒ 넥슨


아카이브 운영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듀랑고는 정해진 목적이 없는 샌드박스 게임이었기 때문에 자유도가 매우 높았다. 이러한 특징은 창발적인 플레이를 가능케 하지만, 선형적인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몸에 익은 유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유저들에게 게임을 즐기는 다양한 방식을 소개할 가이드가 필요했다.

나는 디시인사이드, 인벤, 트위터 등 여러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유저들의 재미있고 독창적인 피소드를 수집해 아카이브에 전시했다.

"나 아카이브 탔다!"라며 기뻐하는 유저들의 반응을 볼 때면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졌다.


하루는 저녁 무렵 유저들에게 보상을 지급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보통은 "보상이 도착했습니다."처럼 정보 위주의 문구를 사용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접근을 해보고 싶었다.

어느날 불현듯이 정체 모를 원시 세계에 뚝 떨어져버렸다는 내러티브를 지닌 게임에서 때마다 시스템적인 보상을 주는 게 어색하기도 하거니와, 문득 퇴근길 지하철에서 오늘도 수고했다는 방송을 듣고 미소 지었던 게 떠올라 이런 위안을 유저들에게도 선물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소 복잡한 세계관, 방대한 읽을거리를 거뜬히 소화하고 더 많은 '떡밥'을 기대하는 유저들의 성향도 고려했다.

그래서 보상과 함께 런 메시지를 보냈다.


10-3. 편지.png 다시 보니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등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다. ⓒ 넥슨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랑고는 일상에 치여 잊은 줄 알았던 설렘과 뭉클함을 상기시키는 게임이다"라거나 "중한 우편이 사라질까 봐 보상을 받지 못는 중이다" 등의 동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고객센터로는 "이 글을 쓴 사람은 언제 게임에 등장하냐", "작성자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냐" 같은 문의까지 유입됐다.


이러한 시도는 유저뿐만 아니라, 유관 부서와의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기도 했다. 기획팀, 개발팀에서 세계관과 서비스의 결을 맞추려 노력해 주어 고맙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해온 것이다.

이때 느꼈다.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 하나에도 성을 들이면 유저와 동료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더불어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기계적, 반복적인 일을 간단한 프로그래밍으로 자동화해 보는 등 평소라면 생각지 못했을 도전에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도 의미가 있더라.



따뜻한 마음이 당신에게 닿기를


언젠가 마음을 다해 썼던 짧은 글 한 편이 친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스함이 또 다른 이에게 해지기를 기대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유저들과 소중한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언젠가 A, U, D가 들어간 또 다른 이름으로 진심을 건넬 날이 오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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