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무엇을 만드는가 #1
게임은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때론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어떤 게임은 치밀한 전략을 요구하고 어떤 게임은 감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또 어떤 게임은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제시 셸의 저서 The Art of Game Design에 따르면 게임을 구성하는 네 가지 핵심 요소는 메커니즘, 기술, 미적 요소, 이야기다.
메커니즘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규정하는 규칙과 절차다. 기술은 게임이 구현되는 기반이다. 미적 요소는 시각과 청각을 포함한 감각적 경험을 구성하고 이야기는 게임이 전달하는 사건과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게임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다. 어떤 게임은 정교한 규칙을 중심으로 설계되고 어떤 게임은 서사를 강조하며 감정적 몰입을 유도한다. 게임 기획이란 결국 이 요소들을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자, 하나의 게임이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게임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이란 게임이 작동하는 방식, 즉 플레이어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과 절차를 의미한다. 모든 게임에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특정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어린 시절 즐긴 빙고를 떠올려보자. 무작위로 숫자가 불리고 플레이어는 자신의 카드에 해당 숫자가 있으면 체크한다. 가장 먼저 특정한 패턴을 완성하면 승리한다. 간단한 규칙이지만, 숫자를 채워가는 과정에서 기대감과 긴장감이 형성된다.
현대 게임에서도 메커니즘은 플레이어 경험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스타크래프트(StarCraft, 1998)는 자원을 모으고 유닛을 조합하며 상대의 전략을 예측하는 복합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높은 전략성을 요구한다. 다크 소울(Dark Souls, 2011)은 적의 패턴을 분석하고 공격과 회피를 정교하게 수행하는 전투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성취감을 극대화한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 1985)는 점프라는 실로 단순한 행동을 활용해 다양한 난이도를 선보인다. 포탈(Portal, 2007)은 공간을 활용한 퍼즐 해결이라는 독특한 메커니즘으로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기술은 게임을 현실로 만들고 게임이 동작할 수 있도록 돕는 모든 요소를 가리킨다.
예컨대 체스를 플레이하려면 말과 보드라는 물리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이 말과 보드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게 기술이다.
기술은 게임을 진화시키기도 한다. 한 때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95보다 더 많은 컴퓨터에 설치된 것으로도 유명한 둠(DOOM, 1993)은 3D 그래픽 기술을 활용해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 장르의 기본을 정립했다. GTA 3(2001)는 오픈 월드 기술을 통해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엘든 링(2022)은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한 협력 및 침입 시스템으로 싱글 플레이 게임에 소셜 요소를 가미했다. 또 최근에는 물리 엔진의 발전으로 게임 속 움직임이 현실에 가까워졌으며 게임에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기술이 접목되면서 NPC(Non-Player Character, 사람이 직접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가 더 자연스럽게 반응하기도 한다.
기술은 경험을 현실로 구현하는 마법이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미적 요소는 게임의 얼굴이다. 미적 요소에는 외형, 음악, 심지어 촉감까지 플레이어가 느끼는 모든 감각적인 경험이 포함된다.
포커를 예로 들어보자. 포커의 미적 요소는 단순히 카드의 디자인뿐만이 아니다. 무겁게 내려앉은 긴장감, 조용히 흔들리는 칩의 소리, 손에 닿는 카드의 질감, 카지노 특유의 공기—이 모든 것이 포커를 플레이하는 경험을 완성한다.
현대 게임에서도 미적 요소는 강력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저니(Journey, 2012)는 대사 없이 색감과 음악만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호라이즌 제로 던(Horizon Zero Dawn, 2017)은 대자연과 기계가 공존하는 독창적인 비주얼로 플레이어를 매료시킨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2013)는 캐릭터 표정과 사운드를 극한까지 디테일하게 구현하며 몰입도를 높였다.
"이 게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구나."
플레이어가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 게임은 미적 요소를 제대로 활용한 것이다.
마지막 요소는 이야기다. 스토리는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며,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내러티브다.
스토리는 반드시 정해진 줄거리가 있는 형태일 필요는 없다. 마인크래프트(Minecraft, 2011)처럼 플레이어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임도 있고 아우터 와일즈(Outer Wilds, 2019)처럼 조각난 서사를 퍼즐처럼 맞춰야 하는 게임도 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 2018)은 플레이어의 선택이 직접 스토리를 결정하는 인터랙티브 무비 스타일의 게임으로 내러티브의 힘을 극대화한 사례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스토리는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라, 게임이 플레이어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게임 연구 분야에는 게임을 이해하는 두 가지 주요 접근법이 있다. 바로 루돌로지(Ludology)와 내러톨로지(Narratology)다. 루돌로지는 게임을 규칙과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 바라보며 게임의 메커니즘과 플레이어의 행위를 중시한다. 이 접근법은 게임을 독립적인 놀이 형태로 분석하며 서사 요소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내러톨로지는 게임을 이야기의 한 형태로 보고 플레이어가 직접 서사를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 접근법은 게임을 문학이나 영화와 유사한 매체로 분석하며 플레이어의 경험을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과거에는 이 두 접근법 사이에 논쟁이 있었지만, 현재는 많은 게임이 메커니즘과 내러티브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플레이어에게 풍부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예컨대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The Legend of Zelda: Breath of the Wild, 2017)는 플레이어가 방대한 오픈 월드를 자유롭게 탐험하고 퍼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메커니즘의 깊이를 보여주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Red Dead Redemption II, 2018)는 살아 숨 쉬는 오픈 월드와 강렬한 스토리텔링을 결합해 메커니즘과 서사의 조화를 이뤄냈다.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균형 있게 통합하여 플레이어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물한 것이다.
오늘날 게임 시장에서 AAA 게임이라는 용어는 흔히 대규모 예산과 인력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게임을 의미한다. 영화로 치면 할리우드 대작과 같은 개념이다. 이 게임들은 뛰어난 그래픽, 방대한 콘텐츠, 정교한 게임플레이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며 출시 전부터 대대적인 마케팅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AAA 게임의 개발 비용은 점점 증가하고 있고 이로 인해 게임 업계와 소비자 모두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 문제는 앞서 논의한 미적 요소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픽이 게임의 몰입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고퀄리티 그래픽과 기술적 완성도가 단순한 강점이 아니라, AAA 게임이 갖춰야 할 기본 조건처럼 여겨지고 있다. 과거보다 더 정교한 모델링과 애니메이션, 더 넓고 세밀한 오픈 월드, 실사에 가까운 조명과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개발사들은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개발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이 급등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데스다가 야심 차게 선보인 스타필드(Starfield, 2023)는 광활한 우주 탐험과 방대한 콘텐츠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2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개발비와 8년 이상의 오랜 제작 기간에도 불구하고 부진한 평가를 받았다. 수려한 그래픽은 물론, 알고리즘을 통해 다채로운 생태계를 자동으로 만들어내는 절차적 생성 기술 등을 보여주었음에도 식상하고 반복적이며 부실한 플레이 경험이 플레이어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AAA 게임의 높은 개발비가 항상 게임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높은 비용과 긴 개발 기간이 오히려 창의성을 억제하고 부담감을 키워 안전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AAA 게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독창적인 아이디어보다 검증된 공식이 반복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반대로 비교적 적은 개발비로 제작된 인디 게임들이 게임성과 창의성으로 AAA 게임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발라트로(Balatro, 2024)는 복잡한 연출 없이도 카드 덱 빌딩이라는 핵심 재미를 극대화하며 많은 플레이어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런 게임들은 최신 기술과 고사양 그래픽이 없어도 게임 자체가 재미있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AAA 게임의 개발비 증가 문제는 '미적 요소의 발전'과 '게임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 딜레마다. 더 뛰어난 그래픽과 기술을 요구하는 소비자의 기대와 이를 충족시키면서도 사업적으로 성공해야 하는 개발사의 고민 사이에서 게임 업계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다.
더 화려한 게임이 항상 더 재미있는 게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의 본질은 결국 플레이어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게임은 우리가 새로운 규칙을 배우고 감각을 열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어떤 게임은 정교한 메커니즘으로 플레이어를 몰입하게 만들고 어떤 게임은 최첨단 기술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며 어떤 게임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또 어떤 게임은 우리가 직접 이야기를 쓰게 만든다.
당신을 가슴 뛰게 한 게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