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8일, 데카르트 '코기토 에르고 숨' 수업을 듣고
<인셉션>과 <트루먼 쇼>를 봤을 때가 떠오른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일까?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현재일까? 겁이 났다. 흥미로운 스토리 구성이나 훌륭한 연출 등이 한 몫 했겠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에 깊게 몰입하여 본 나머지 머리를 한번 '뎅' 하고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회의주의자들과 데카르트는 세상을 <인셉션>에 나오는 꿈 속의 꿈 혹은 <트루먼 쇼>의 TV 쇼의 트루먼 쇼처럼 바라볼 것 같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그렇게 인생을 피곤하게 살려고 하지?'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걸. 좋은 게 좋은 거지' 와 같은 생각들이었다. 이내 수업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가졌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삶을 정당화 해 주고 익숙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고 반대로 내 삶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과하게, 필요 이상으로 의심해왔다. 맞다 정말. 이런 식의 합리화는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고 내가 서 있는 이 지반을 단단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어줬으니까.
나는 대학교 학부 5년, 대학원 3년, 그리고 직장 생활 2년차인 지금까지 쭉 축산업 이라는 분야에 몸담고 있다. 꽤 긴 시간동안 가축의 생리, 사료, 사육 방법, 및 축산물 품질 평가 등에 대하여 공부해왔고 현재는 동물용 사료 첨가제를 파는 회사에서 영업 및 마케팅 직무를 배우고 있다. 철학을 배우기 전까지, 나는 축산학이 정말 선한 학문이라고 믿었다. 내가 축산학이 선한 학문이라고 믿었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논리라고 말하기에도 허접한 나만의 합리화이지만, 어찌됐건 그 합리화를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살펴보니 사상누각이 따로 없었다.
나는 (채식주의자를 제외한다면) 육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자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을 무조건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기를 생산하는 동물들의 희생이 뒤따른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나는 축산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육식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동물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동물 복지에 관한 연구나 인공육에 관련된 연구도 모두 축산학이라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흐르는 지류와 같은 연구 분야였으니까. 우습게도 나는 내가 동물과 인간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축산학을 통해서 동물과 인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에게 축산학이라는 학문은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선이었다.
그런데 축산학이라는 학문은 '정말' 선한 학문일까? 우선 축산학의 정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축산 (畜産, 영어: animal husbandry)은 가축을 번식하고 길러 생활에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는 농업의 한 부분이다 [구글 위키백과]
이걸 더 적나라하게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축산 (畜産, 영어: animal husbandry)은 '인간에게 있어 최소한의 돈과 시간과 노고를 들여' 가축을 번식하고 길러 '최대한으로 인간의' 생활에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는 농업의 한 부분이다 [구글 위키백과]
즉, 축산업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추구하는 학문이고 그 수단으로서 생명체인 가축을 이용하는 학문인 것이다. 수혜자의 위치에는 오직 인간만이 존재한다. 결국 축산학은 '가축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학문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니 축산학이 굉장히 야만스러운 학문인 것처럼 보인다. 맞다. 축산학은 정말 야만스러운 학문이다.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 관해서는 그렇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굳건히 축산학이 선한 학문이라고 믿었을까? 이것을 의심하게 되면 나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나의 도덕적 윤리적인 가치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내가 후지고 악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축산이 선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양돈학 실험실에 내 발로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사과정을 또 다시 단위동물 영양생리 분야로 지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깟 학술지에 내 이름 박힌 논문 몇 편 싣겠다고 불쌍한 돼지들이 그 비좁은 대사틀에서 일평생을 살다 생을 마감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돼지들을 발로 차거나 소리 지르며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많은 위선들을 겹겹이 쌓아 올려 나는 동물과 인간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고, 그렇게 제법 멋지고 괜찮아진 나에게 축산학은 더할 나위 없이 선한 학문이 되었다. 나의 안온한 삶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서. 나의 명예욕과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는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 두려워서 의심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의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내 삶을 마구 흔들고 싶다. 언제나 글은 실제 나보다 저 멀리, 몇 천보 앞서 나아가기에 매 순간 얼굴을 붉힐 것이고 언제나처럼 징징댈 테지만 말이다. 강건한 삶을 위한 여정은 정말 힘들고 험난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