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피히테 '자아' 수업을 듣고
피히테에 따르면 '나=나'가 되게 만드는 것은 과거의 대상 (나)와 현재의 나 (주체)를 연관지어 통일시키는 활동, 즉 자아이다. 우리는 자아를 가짐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물이 'A=A' 임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자아, 자기의식을 가지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바로 기억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 기억들의 총합이다.
피히테 수업을 들으면서 그간 왜 나 자신을 안개 같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과거의 기억을 꺼내어 반추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학공동체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나의 기억들을 글로 써내려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거를 성찰하는 것이 기쁨만 가득하거나 수월한 작업은 아니었다. 과거의 나약하고 못난 나로 회귀할 것만 같은 불안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에 집착했기 때문이었을까. 바꿀 수 없는 나의 과거가 너무 못나보였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모두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성공과 행복의 기준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사실과 한 번도 그것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속박과 의무의 삶 속에서 잘 살고 있다며 스스로를 속여 왔던 삶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나는 은연중에 내가 잘못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 삶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나의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었을리가 없다.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나의 자아는 나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의 외부 세계와 타자들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자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나 (주체)와 타자 (대상)를 제대로 연관지어 통일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내가 했던 사랑들은 죄다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보지 못했던 지독히도 유아적인 사랑이이었다. 자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비어있는 자아의 자리에 타자를 사물화 시켜서 쑤셔 넣으려고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외롭고 공허했기 때문이었다.
철학공동체에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내 과거의 삶이 전부 슬픔의 변주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철학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니 나도 철학자들처럼 멋지게 온몸으로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눈앞에 멋진 길, 강건한 길, 그리고 내가 그토록 찾아 헤메던 옳은 길이 펼쳐저 있는데 왜인지 그 길의 시작점에서 한 걸음 떼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니, 사실 한 걸음은커녕, 현재의 나는 과거의 기억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대느라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었다. 내 삶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긍정하는 것이 힘들었다.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긍정을 하는 순간 나는 삶을 레벨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옳은 삶과 멋진 삶의 산등성이가 너무나 높아 보여서 숨이 턱 막혔다. 어이없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무작정 수치스럽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기만 했다.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했다. 생각을 되돌리려고 하면 도돌이표처럼 그런 생각이 반복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새는 그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삶은 유난떨 것 없이 그냥 사는 것이라는 말, 그리고 기쁨의 순간이 올 때까지 버티며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삶을 너무 진지하게 잘 살고 싶었나보다. 욕심많고 진지충인 내 모습이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게 나인 걸 어쩌겠나. 사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내 자신도 기특하고 신기하다. 철학공동체에서 나의 알몸을 그대로 까발렸을 때 받았던 사랑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었다. 나조차도 예뻐 보이지 않는 내 모습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나는 사실은 정말이지 가슴 벅차오르는 행복이다. 사랑이란 건 정말 신비롭다.
니체가 말한 낙타와 사자와 아이 중에 나는 낙타와 사자 중간즈음에 있는 것 같다. 이미지화하면 몸뚱아리는 낙타인데 사자 갈기가 돋아난 형상이다. 과거의 내가 귀여워 보이고 그동안 애썼다고 토닥일 때 즈음이 되면 사자로 완전히 변태할 수 있을까. 어찌됐건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나는 지금껏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라는 사실을. 과거의 목적론적 사고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니체의 '낙타, 사자, 아이' 개념을 배우고 나도 모르게 '아이'를 목표로 삼고 만다. 그러나 철학을 배우면서 삶에 목표나 결승점이란 있을 수 없음을 배웠다. 삶은 경유지는 있으나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는 여행과 같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은 그 지난한 여행중에 겪는 수많은 마주침 속에 있다.
얼마 전 앎과 삶은 인간의 이족보행과 유사하다는 철학 스승님의 말을 몸소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앎과 삶에는 분명히 시간차가 있다. 실험실 회의 시간에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이 자주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지도교수의 말에, 피히테의 테마 '고정된 자아는 없다' 가 떠올랐다. 대놓고 반기를 들고 싶었으나 강건하지 못한 나는 그러지는 못했다. 미래의 내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수도 있다며 걱정을 가장한 강요를 하는 지도교수의 말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누가 아무리 설명해줘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봐야 압니다" 라고 공손히 맞받아쳤다. 슈퍼 합리주의자인 지도교수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그 순간을 견뎠다. 나는 이제 물러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의 실전 수준은 아직 햇병아리라 앞으로도 미팅에 참여하라는 지도교수의 요청은 거절하지 못했다. 앎이 두세걸음 앞서 나가면 삶은 참으로 더디게 나아간다. 지금은 우스꽝스러운 절름발이지만 언젠가는 멋진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요새는 '타자와 교집합을 어떻게 넓힐 것인가?'가 나의 주된 관심사이다. 과거의 나의 자아는 매우 희미했기에 타자와 나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을 정돈한 사람만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현재의 나의 자아는 너무 약하고 깨어지기 쉬워서 영화 주인공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는 것조차 힘겹다. 그 무게가 너무 묵직하다. 하물며 실제 삶에서 마주치는 타자들의 삶을 헤아리는 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일일까.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삶의 맥락과 구조를 만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을 진심으로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을테다. 진정한 행복은 타자와 사랑을 주고받음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 스스로가 기쁘고 충만해야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이기심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그 끝엔 사랑과 이타심이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