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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Nov 22. 2022

철학을 배우며 알게 된 것들

2021년 3월 29일, 탈레스 <형이상학> 수업을 듣고

직장인이 된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철학을 배우기 시작한지 어언 1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서 생소하고 얼떨떨하다.


나는 평생 농장에서 돼지들과 뒹굴고 실헌실에서 실험하고 주구장창 논문이나 쓰는 삶을 살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그 때에는 밥벌이에 충실한 삶을 '형이하학적'이며 '별 볼 일 없는 삶' 이라고 생각했고, 과학적 진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삶이 '형이상학적'이며 '고결한 삶' 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마 내 삶의 궤적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앞 문단을 읽고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맞다. 나도 이 문단을 쓰면서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평생 단 한치도 내 몸으로 밀어붙이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내가 형이상학적 삶을 추구 했었다니. 진짜 삶을 살 자신이 없어서 관념의 세계로 도망쳤던 겁쟁이에 불과했으면서 말이다. 


이십대 초반이었던가. 사랑에 회의적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부모의 사랑도, 연인의 사랑도, 친구의 사랑도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뿌리내려 필요한 것들을 약탈해가는 거래적 관계이자 비겁한 술수라고 생각했다. 철학을 공부하며 그 회의주의와 공허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에게 의존하고자 했던 나의 나약함이었으며, 연인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사랑 받기만을 원했던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 무렵 한창 리처드 도킨스에 매료되었다. 사랑과 섹스, 나아가 생명체의 본질에 대해 이성적으로 해석한 그의 이론들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은 나를 뒤흔들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것을 유전자와 호르몬과 뇌 과학 따위로 가시화시켜 놓으니 안심이 되었던걸까. 온 몸을 다해 사랑하는 삶이 무서웠던 내가 도망칠 구석을 찾은 셈이었다. 급기야 진화 생물학에 꽂혀서 무작정 유전체학 실험실에 들어갔다가 맥없이 좌초하고 좀 더 쉬워 보이는 양돈영양학이라는 분야로 진로를 틀었다. 애초에 두려움에 몰려 도망쳤던 것이었으니 무엇 하나 진지하게 임했을 리 만무했다. 


여기서도 내 비겁함은 끝나지 않았다. 학위를 받고 나서 큰 의미부여 말고 열심히 돈 벌고 기쁨을 좇는 삶을 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거기서도 나는 내 삶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 헤멨다. 나의 본질을 '과학적 진리 탐구에 기여하는 청렴한 연구자'로 상정하고 나의 본질과 존재에 자물쇠를 채워 그 부자유 속의 안정감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자물쇠는 점점 무거워져 내 숨통을 조여왔다. 삶을 건너 뛰어 관념 속으로 도망치려 했으니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오늘 하루치의 기쁨과 행복을 저당 잡아 미래의 기쁨과 행복에 저축을 했다. 언젠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는 그날 모두 꺼내 쓰리라, 하면서 말이다. 그 언젠가가 언제일지에 대해서는 내 죽음이 언제일지 모르는 것만큼 까무룩 몰랐으면서. 


그랬던 내가 철학을 배운지 1 년 만에, 과거 내가 생각했던 본질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살고 있다. 회사에서조차 그렇다.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그것이 영업 실적과는 상관관계가 높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이 곳은 학문적 타당성보다 실용성과 정치가 진리인 세계였다. 내가 믿었던 진리가 무참히 깨어지니 허무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는지 여실히 깨닫고 있다. 


그뿐인가.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난생 처음 인생의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볍고 기쁘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고정적인 본질과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며 살아왔던 나였는데 철학을 통해 고정된 진리는 없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본질의 본질은 '유동성'과 '다양성'에 있다. '본질'은 사후적이기에 결코 불변하지 않으며 (유동성),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에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다양성).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 관계,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30년동안 부자유의 안정감 속에서 살아왔던지라 불안정한 자유를 양 팔로 힘껏 껴안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 그 비좁은 부자유의 우리를 깨부수고 나와 자유인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한다. 미성숙하고 얄팍했던 과거 나의 모습이 부끄럽고 현재 상태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과거만큼은 아니다.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고 하지 않았나.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악착같이 기쁨을 좇을 것이다. 드물고 귀하기에 무겁지만 너무나 유쾌하기에 가벼운 그 기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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