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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Nov 30. 2022

후회하지 않는 법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1)

나는 집 청소를 잘 하지 않는다. 대략 2~3주에 한번씩 청소를 한다. 실평수 6.5평의 코딱지만한 자취방 치우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쓰레기장같은 광경을 마주해야만 청소할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특히 더 했다. 쓰레기를 제 때 치우지 않아서 온갖 쓰레기들이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세탁물들은 이리저리 구겨진 채 의자며 공기청정기며 이곳저곳에 걸려있고, 먹은 그릇은 설거지를 하지 않아서 슬슬 하수구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머리카락이 지렁이 짝짓기 하듯이 바닥을 기어다녔다. 내가 봐도 너무 심했다 싶을 정도로 집안이 난장판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마주하는 장면이 그런 식이었으니, 집에 오면 맥이 빠졌다. 그렇다면 마음 딱 걷어 붙히고 청소를 하면 됐는데 그러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책상에 잔뜩 쌓인 짐들을 한뼘 정도 밀어내 겨우겨우 숨쉴 공간을 마련해 거기서 볼일을 보고, 그러고 또 뒷정리는 하지 않고. 그러다보니 물건을 잃어버리기도 다반사였다. 올해 내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기증한 물건들만 값을 매겨도 아마 한달치 월급은 나올 것 같다. 그러다보니 집에 있으면 힘이 빠지고 우울해졌다.


우울해지니 점차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해갔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주 연속 며칠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들은 있었지만 모두 그럴듯한 핑계였다. 체육관이 열지 않아도 집에서 요가를 하든 한강 산책로를 달리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하지 않았다. 마음이 우울해지니 몸이 쳐지고, 몸이 침체되니, 마음이 더 우울해지고, 몸이 더 무거워지는 악순환이었다. 다시는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기분에 굴복해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는 나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심신평행론>이라는 개념을 정의했다. 마음과 신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작동한다는 것이다. 심신평행론에 대하여 전세계 내로라하는 석학들의 심오한 견해들이 수두룩 하겠지만 내가 쉽게 이해한 바로 설명하자면, 지난주부터 아주 최근까지 나의 상태가 바로 심신평행론의 적확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울적해져서 운동이 가기 싫어지고 그러다보니 자극적인 것들을 찾게 되고 그런 내가 싫어서 더 우울해지는, 미궁 깊숙한 곳 축축하고 시커먼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상황.


"나의 몸은 물질계의 총체 속에서 운동을 받아들이고 되돌려 주면서 다른 상들과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하나의 상이다. 다만 나의 몸은 아마도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되돌려 주는 방식을 어느 정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물질과 기억> 46 p, 앙리 베르그손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원문 수업을 듣고 있다. 앙리 베르그손은 19세기 프랑스 철학자로, 시간의 개념을 전통적인 공간 중심의 시간 대신 지속 (체험적 시간)으로 설명한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공간 중심의 수학적 시간)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 (체험적 시간)은 다르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디고, 지루하고, 공허하고, 그래서 나를 지금-여기에 있지 못하게 한다. 자꾸만 퇴근 후 미래의 나 상상하게 만든다. 혹은 직장에 있지 않았던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나를 지금-여기에 있게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시간이 훅훅 지나가 버린다. 그 사이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지게 만든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가 대상을 '지각' 할 때에는 두 가지 신경계통이 작동한다. 구심신경원심신경이 바로 그것이다. 생물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쉽다. 신경계는 중추신경계 (뇌, 척수)와 말초신경계 (체성 신경계, 자율 신경계)로 구분된다.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외부 대상에 반응할까? 외부 대상에서 자극이  발생하며 이것이 감각 신경을 통해 중추신경계 (뇌, 척수)로 전달된다. 뇌와 척수에서 이를 분석하고 어떤 운동을 되돌려 줄 것인지 선택한다. 이 신호가 운동 신경을 통해 운동 기관을 전달되어 운동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감각 신경구심 신경이고 운동 신경원심 신경이다.

감각 입력 (->): 감각 신경 (구심 신경); 운동 출력 (<-): 운동 신경 (원심 신경)


흔히 우리는 '지각'이라는 현상에는 구심 신경만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나를 향해 뻗는 주먹을 눈으로 보는 과정' 만이 '지각'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베르그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나를 향해 뻗는 주먹을 눈으로 보는 과정' 은 구심신경의 작용이다. 베르그손은 구심신경원심신경이 작동하는 과정 전체가 '지각' 이라고 말한다. 즉, '상대방이 나를 향해 뻗는 주먹을 눈으로 보는 과정'을 뇌와 척수에서 받아들인 뒤 (구심신경) 분석과 선택의 과정을 거쳐 원심신경을 통해 '상체를 비틀어 주먹을 피하거나' '손을 올려 주먹을 막는' 행동을 운동 기관에 되돌려 주는 과정 (원심신경) 전체를 '지각' 이라고 정의한다.   


"신경계통이 발전할수록 더 수가 많고 더 멀리 떨어진 공간의 점들을 항상 더 복잡해지는 운동 장치와 관계 맺게 해 준다. 이렇게 하여 그것이 우리 행동에 남겨주는 자유 (latitude)가 넓어지고, 그것의 증가하는 완성도는 바로 거기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신경계통이 동물 연쇄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점점 필연성이 감소하는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본받아 진보하는 지각 역시 그 전체가 순수 인식이 아니라 행동을 향한 것이라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때서부터 지각의 증가하는 풍부함 자체도 단지 사물에 대한 생동에서 생명체의 선택에 남겨진 비결정성의 증가분을 상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물질과 기억> 64 p, 앙리 베르그손
"지각의 내적 본성이 어떤 것이든, 지각의 풍부성은 뒤따르는 행동의 비결정성과 정확하게 같은 크기임을 인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다음과 같은 법칙을 말할 수 있다. 행동이 시간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는 것과 정확히 비례하여 지각은 공간에 대한 재량권을 가진다." <물질과 기억> 66 p,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에 따르면 나의 몸은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되돌려 주는 방식을 어느 정도 선택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철학을 배우기 전, 나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했다.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청소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갑자기 사고 싶은것이 생기면 돈이 없는데도 충동 구매를 하고,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상처를 줬다.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운 일을 할수록 강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내리치는 죽비로 후드려 맞고는 내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생물인 돌맹이와 생물인 인간이 다른 점이 무엇일까? 돌맹이는 누군가가 발로 차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 힘의 세기, 그 힘이 가해진 각도, 그리고 그 돌맹이가 놓여있던 땅의 마찰력, 바람의 세기와 방향, 주변 공기의 온도 습도와 밀도 등등 여러가지 물리적 조건이 변수로 이루어진 복잡한 함수에 근거하여 도출된 특정한 양태로 날아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발로 찬다면?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이 실수한 거겠지" 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직장 상사였기 때문에 눈치 보느라 애써 안 아픈척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발로 찬 사람이 다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픈 티 내지 않고 빙그레 미소를 지을수도 있다. 여기서 돌맹이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돌맹이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이 오직 한 가지이지만, 인간의 몸은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되돌려 주는 방식이 여러가지라는 것이다. 돌맹이는 외부 환경에 필연적이고 결정적으로 반응하지만 인간은 외부 환경에 비필연적이고 비결정적으로 반응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을까? 베르그손이라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신경계통이 더 발달할수록 지각이 풍부해지며, 행동에서의 자유의 폭이 넓어진다고 말한다. 지각의 풍부함은 곧 사물에 대한 생동에서 생명체의 선택에 남겨진 비결정성의 증가분을 상징한다. 행동이 시간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기에, 진정으로 행동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시간이 없다' 는 핑계를 쉽사리 대지 못하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것 사주고 선물 사 주려면 돈 벌기 위해 일해야 하고, 의미없이 유튜브 보며 흘려보냈던 시간에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테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을 빼먹지 않고 나갈 테니까. 지각이 공간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기에, 지각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퇴사하고 나면 좋아하는 일을 할 공간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퇴사했는데 밥벌이를 못 하겠다' 는 핑계를 쉽사리 대지 못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진심으로 '지각' 하게 되면 카페든 길바닥이든 지하철이든 일터가 될 것이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벌려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하게 될 테니까.


다시 글의 서두로 돌아가 봐야겠다. 나는 왜 청소를 미루고 미루다가 우울함에 잠식되고 말았을까? 나는 유능하기보다는 무능한 정신과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지각의 상태가 미성숙했기 때문이다. 외부환경에 나의 루틴을 쉽사리 저버릴만큼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필연성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을 뿐 필연적이지 않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해가 진다. 지구와 달과 태양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밀물과 썰물이 발생한다. 반면 나는 외부 자극 (타자와의 마찰)을 좁은 자유도를 가진 지각 체계 (우울할 때 무기력해진다)로 지각하여 필연적인 행동 (슬픔을 증폭시키는 행동을 함)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사랑의 밀도는 사랑하지 않는 시간동안 결정된다"


철학 스승이 했던 말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의 밀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하는 애정표현으로 결정되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과거 나의 연애들을 떠올려보니 알겠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매일 새벽까지 일을하고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데이트 장소로 나갔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속상한 일이 있으면 밤늦게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위에 잔뜩 쑤셔 넣어서 다음날 그가 마음써서 찾아온 맛집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를 걱정시키기만 했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울한 일이 생기면 히키코모리처럼 집안에만 콕 박혀있다가 잔뜩 어두운 얼굴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와 함께 있지 않는 시간동안 나는 그를 사랑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정작 그와 만나 지속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사랑받고 싶은 나약한 마음과 죄책감에 새치혀로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만 나불댔을 뿐, 나의 행동은 사랑-없음의 행동이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 내가 세계에 대한 나의 지각이라 부르는 상들의 체계가 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상, 즉 나의 몸이 조금만 변해도 밑바닥으로부터 꼭대기까지 완전히 뒤집어져 버린다. 그 특별한 상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다른 상들이 조절된다. 만화경을 돌린 것처럼 그것의 각 움직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 다른 한편 여기 그 동일한 상들이 이번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진 것으로서 있다.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결과가 항상 원인에 비례한다는 방식에서이다. 이것이 내가 우주라 부르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55 p, 앙리 베르그송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결국 사물들이 우리의 자유에 반사되어 온다는 데서부터 발생할 것이다. ... 지각은 같은 종류의 현상이다. 주어진 것은 물질계의 상 전체와 그들의 내적인 요소들 전체이다. 그러나 진정한 활동성, 즉 자발적인 활동성의 중심들을 가정하면 거기에 도달한 광선 중에 그 활동성이 관심을 갖는 것은 통과하지 않고 그 광선을 보낸 대상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방해받은 굴절로부터 오는 반사의 현상을 상당히 닮았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 효과와 같다." <물질과 기억> 74 p, 앙리 베르그송


사랑한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다. 나의 움직임에 따라 상대방의 움직임 또한 바뀌고 영향을 받는다. 내가 슬프면 사랑하는 사람도 슬프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도 슬퍼진다. 내가 기쁘면 사랑하는 사람도 기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도 기뻐지고... 그렇게 무한대의 진동들이 엮이고 엮여 광대한 파동이 된다. 너도 나도 온 우주도 쉬지 않고 떨리는 진동이다. 그렇기에 영화 <나비효과>처럼 나의 작은 몸짓하나 표정 하나가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 사랑하는 상대일수록 그만큼 더 섬세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내가 속한 철학 공동체와 스승과 동료들을 소중히 여긴다고 나불대고 다녔으면서, 근래 나의 행동은 사랑-없음의 행동들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시간동안 슬픔은 줄이고 기쁨을 축적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내가 후회하는 행동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고 그 선택을 선택할 자유는 나에게 있다. 나는 나에게 더욱 기쁨을 주는 선택을 선택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어떤 선택이 더 기쁜 선택인지는 우리는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한다. 내 앞에 있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자 일반은 표상사물 사이 어딘가에서 떨리고 있는 어떤 것, 진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각한 것은 수많은 진동들 중 한순간의 단면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그 우울함과 슬픔의 감정들은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낸 신기루이다. 외부의 상이 나를 통과할 때, 내 마음에 존재하는 어떤 굴절 때문에 방해받아 왜곡된 표상으로 반사되는 신기루.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마음의 요동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 위해서는 구심신경과 원심신경을 모두 유능하게 해야 한다. '지각'은 원심신경과 구심신경이 함께 작용하는 과정이니까. 가만히 앉아서 짱구만 굴리고 있어서는 자유의 폭은 증가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운동할 기분이 아니라느니 컨디션이 안 좋다느니 하는 마음의 소리를 과감히 꺼버리고 우선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다. 체육관에서 열심히 운동을 했다. 내 몸을 둘러싸고 있던 뿌연 관념이 걷히고 그 걷어낸 자리에 신체의 유쾌함이 차오른다. 못할 것만 같던 것들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되든 되지 않든 그저 해야할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을 정성들여 묵묵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진리는 이토록 단순하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 법은 간단하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거나 (공간화된 시간), 이미 후회할 일이 생겼다면 현재를 미친듯이 최선을 다해 잘 살아야 한다 (지속의 시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현재를 분출해서 과거를 침범하고 미래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렇게 삶으로 죽음을 넘어설 수 있고 죽음으로 삶을 넘어설 수 있다. 나는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 통곡하며 자기연민에 휩싸인 채로 못난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 죽음을 맞이 할 때 "한 생애 잘 놀다 간다" 라며 웃으며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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