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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니 Oct 31. 2017

더할 나위 없었다, 김주혁

느리지만 꾸준하게 흘러온 연기여정


영화를 사랑하고 한국영화를 사랑하고 그렇기에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을 사랑하는 나에게 김주혁은 돌이켜보면 늘 특별히 사랑하는 배우로 존재했었다.

대작배우가 아니였어도, 톱스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 과잉된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가려지고 왜곡되기 일쑤인 배우의 연기와 배우 그 자체에 대해 도리어 김주혁은 가장 자유로운 배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거장 김무생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는 김주혁이 누구인가를 빛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기도 했었을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로서는 누구나 한 번 쯤은 동네를 지나가며 접했을 법한 우리네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를 가졌다. 다만 김주혁의 소시민 캐릭터들은 그만의 특징들이 있었고 난 그게 참 편안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영화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의 두식.


대개 한국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장르영화를 이끌며 멋있고 강렬한 임팩트를 가진 게 태반인데, 김주혁의 2000년대 영화들은 그와는 거의 정반대라 할 수 있는 소위 '별볼일 없는' 남자 역할이 많았다. 소심하고 용기도 없고, 능력있어 보이지도 않은데 그 나른한 인상까지 한몫했던. 그러나 김주혁표 소시민의 특징은 평범하기만 한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아주 느리게 흐르는 꾸덕꾸덕한 액체처럼 점성이 있었다.


은은한 담백함


홍반장을 비롯해 싱글즈, 광식이동생광태, 아내가 결혼했다 등에서 느낀 거지만 김주혁은 언제나 담백하고 은은하다. 과하지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편안하고 자꾸 땡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가 별볼일 없는 남자의 포지션에서 사랑했던 그녀들은 거의 당차거나 빛나는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에 용기내기 어려우면서도 그는 자기를 꾸미거나 어떤 열렬한 행동을 취하기 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를 필요로 하는 부분에서 성실한 남자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감정에 앞서 여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어느새 그 수수하고 숫기없는 모양은 별볼일 없던 초라함에서 편안함이란 정서로 서서히 변해간다. 그 과정에 있어 감정적으로 섬세한 연기가 바로 눈에 띄지는 않아도 뭔가 여운이 꾸덕하게 남는 김주혁의 비밀아닌 비밀이라고 할까. 필모를 쌓으며 사극과 장르물 등으로 분위기를 확장시켜왔지만 '별볼일 없는' 김주혁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아스라한 여운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점점 시간이 흘러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쯤, 영화에서 로맨스는 사라져가고, 드라마에선 정서를 잃고 현란한 볼거리에 양념처럼 편승하거나 판타지에 기대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제는 완연히 아날로그의 감성이란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이 바뀌었어도 사람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최근작에서의 김주혁이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 의 우진.


최근으로 올수록 김주혁은 장르물로의 진출을 많이 보였고 비로소 연기력의 내공을 인정받았던 사이에서, 짧고 굵게 로맨스를 거쳐갔다. 한 역할에 100명이 넘는 연기자가 동원되었던 뷰티 인사이드의 우진에서부터 좋아해줘의 성찬, 응답하라 시리즈의 어른이 된 택이 등이 그것이다. 이때의 김주혁은 비로소 그의 화려하지 않은 담백함의 진가를 찰나의 순간에 찬란하게 보여준 것 같다. 별 거 아닌 작은 행동에도 정서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바뀌고 가치관이 변했어도 사람은 건재하고 살아서 숨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의 담백함으로 조용히 말하는 것이다.


필경 로맨스 뿐만 아니라 장르에서도 김주혁이라는 이름의 정서는 작품 전체에 먹처럼 은은하게 배어들었다. 그 정서의 꽃이 만개한 것이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아르곤'이 아니었나 한다. 아르곤의 백진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음에도, 그가 아르곤 팀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왜 그렇게 냉철해져야만 했는지를 무언의 정서로 보여주었다.



극중 백진이 신철과 빗속에서 갈등하던 장면이 있었는데, 여기서 백진의 복잡한 속내가 신철의 그것과 뒤엉키며 발현된다. 이 장면 하나가 김백진을 설명한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하릴없이 비를 맞으면서도 신철을 어쩌지 못하고 섰는 김주혁의 연기는 힘이 빠진 장면이었음에도 실로 강력했다.


20년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걸으며 존재 자체로 정서를 만들어 온 한 배우였다. 꽃은 만개할 때가 있으면 낙화할 때가 있는 법이라지만, 김주혁은 좀 더 만개할 수 있었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슬프다. 이렇게 또 하나의 정서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또한 슬프다.



시간이 더욱 지나서라도, 배우로서 남긴 그의 족적에 묻은 정서의 향기는 늘 은은하게 남아있기를 바라며 아름다운 이별을 고한다. 그가 풍미했던 한 시대, 그보다 더할 나위 없었다. 편히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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